■ 인터뷰 -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이인호 박사

이인호(85) 박사는 1956년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역사학으로 학사, 소련지역 연구로 석사과정을 마친 후, 하버드대학교에서 러시아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취득 후 컬럼비아대학과 자매학교인 바아나드대학에서 강의를 하다가 16년간의 미국생활을 접고 1972년 귀국했다. 
귀국 후 이 박사는 고려대와 서울대에서 후진 양성에 힘쓰다가 1996년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대사로 발탁돼 핀란드와 러시아에서 근무했다. 
그 후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과 KBS 이사회 이사장을 역임한 그는 한국 여성계를 대표하는 지성으로서 지금은 후학들의 역사인식을 바로 잡기 위해 한국현대사 강의를 주로 하고 있다. 이인호 박사의 값진 삶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하버드대서 러시아사 전공해 박사학위
여성최초로 핀란드․러시아 대사 발탁
우리 국민 역사인식 바로잡기에 주력 

친척언니의 권유에 미국유학 결심
“저는 1936년 서울에서 태어나 증조부모님을 모시는 유교가정에서 자랐습니다. 6.25전쟁이 끝난 후 서울대 사학과 재학 중 미국으로 유학을 가는 뜻밖의 행운을 얻었습니다. 전쟁 중 미국으로 건너가 웰슬리대학에 다니던 친척언니의 권유에 부모님께 말씀도 안 드리고 지원했는데 그게 덜컥 된 거예요. 미국 최초의 여성 국무부장관인 매들린 올브라이트와 힐러리 클린턴 여사가 그 대학 출신입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우리는 약소민족으로 설움을 겪었다는 이야기를 하도 들어서 선진국 역사를 공부해 보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대학 2학년 때인 1957년에 소련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 인공위성을 발사했는데, 깜짝 놀란 미국이 소련연구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저도 러시아사 강의를 들어보니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아 러시아 사상사를 전공으로 택했습니다.”

고려대·서울대 교수 거쳐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대사로...

그는 귀국 후 고려대를 거쳐 서울대에서 교수생활을 했고, 신문에 사회문제 전반에 대한 기고도 했다. 그래서인지 공직 제의를 가끔 받았지만 극구 사절했는데, 1996년에 대사 임명을 수락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세계 12위의 무역고를 자랑할 때였는데, 1995년 북경에서 열린 세계여성대회에서 망신을 당했어요. 유엔총회가 발표한 ‘여성 세력화 지수’, 즉 여성활동 통계에서 우리나라가 110개국 중 91등이었던 것이죠. 이에 깜짝 놀란 김영삼 대통령이 최초의 여성장군, 여성대사 등을 발령내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공로명 외교부장관이 제게 연락을 주셨고 이희호 선생님, 김옥길 선생님, 이우정 교수를 비롯한 여성계 선배들께서 강력하게 권유하셔서 학계를 떠날 용기를 얻었던 거죠. 처음에는 전공지역인 러시아가 아니면 안 가겠다 생각했지만 경험 없는 교수를 4강 대사로 발탁하기는 어렵다고 해서 안전하고 작은 나라 중 19세기에 러시아의 속국이었기에 러시아 역사 관련 자료가 많고 러시아를 깊이 이해하는 핀란드를 택했죠. 물론 그것이 러시아대사 자리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었죠.”

그가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주러시아대사로 발령을 받았을 때, 우리 언론은 여자라서 보드카를 못 마시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이라는 얘기를 하곤 했다. 또한, 러시아 정부는 그가 미국에서 공부한 러시아 전문가였기에 처음에 많이 경계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기우였다.
“제가 러시아어와 역사, 문화를 잘 알고 즐기니까 곧 유명인사 파티 같은 사적 모임에도 초대받는 등 문이 열렸습니다. 냉전시대 소련은 우리에게 무서운 존재였지만 깊이 알고 보면 역사적 수난이 많았던 러시아와 우리 문화 사이에는 정서적으로 공감되는 부분이 매우 많습니다.”

국제교류재단서 한국문화 위상 높이기 힘써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으로서의 사명은 우리나라가 문화대국이라는 사실을 세계에 알리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우리가 세계 10위국의 경제대국이지만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대해 아는 것은 6.25로 폐허가 된 나라, 학생과 노동자들의 시위가 끊임없는 나라 정도였지요. 
그런데 외국의 유력인사들이 한국을 방문하거나 황병기 선생의 가야금 연주를 듣는 경험을 하고 나면 인식이 달라집니다. 대영박물관 한국실에 전통 사랑방을 지어 우리도 문화국임을 알리는 일도 했죠.”

그가 KBS 이사장으로 갈 때는 우리 국민의 교육과 문화수준을 높이는데, 특히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도록 하는데 방송을 적극 활용하겠다는 꿈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기자나 제작진이 이미 정치적 편향이 심해 그 뜻을 이룰 수 없었다고. 편파적이어서는 안 될 방송이 정치도구화 돼 있는 상황이 안타까웠다고 그는 회상했다.

“이젠 농촌에서 사는 게 특전이죠”
“농촌여성신문 독자들에게 드릴 특별한 말씀은, 이제 제가 오히려 배우고 부러워해야 할 점이 많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농촌에서 태어나 자랐던 이들은 고생이 심했지만 이제 다행히도 도시와 농촌의 차이는 많이 줄었습니다. 현대문명의 이기를 이용하면서도 전통사회의 아름다운 덕목을 지켜가는 일도 농촌주민들이 더 잘하고 있습니다.

어른들이 많은 전통가정에서 자라면서 사람이 염치와 분수를 알고 인정과 지각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귀가 따갑게 듣고 자란 그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말이지만 미국이든 핀란드든 러시아든 그런 전통교육이 몸에 밴 사람들은 어디서나 서로 알아보고 환영받는다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고 그는 말한다.
“미국 친구집에 외할머니가 계셨는데, 제가 어릴 적 할머니 생각을 하며 친근하게 대하니까 얼마나 좋아하시던지요. 저를 친손녀 같이 보살펴 주셨지요.”

이인호 박사는 어릴 적,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행복의 5대 조건 가운데 하나가 흙을 밟고 사는 것이라고 쓴 것을 읽고 의아해 했다고 한다.
“흙은 누구나 다 밟고 사는 줄 알았지요. 지금 그 말의 깊은 의미에 감탄합니다. 자연과 가까이 접촉하며 산다는 것이 인간에게 너무도 소중한 것인데, 이제는 소수만이 누리는 특전이 되고 있죠. 이웃과 담 없이 사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적어도 정신적으로 담 없이 지낼 수 있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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