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 - (주)파워킹 이순형 대표

삶은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길을 걷는 것과 같다. 그러다보면 어느 날 갑자기 발을 헛디뎌 천길 낭떠러지로 추락해 참혹한 불운을 겪기도 하고, 역경을 딛고 재기에 성공하기도 한다. 수원농고와 서울대 농대에서 농기계를 공부한 뒤 건설장비를 제작하는 (주)파워킹 이순형 대표의 인생이 그렇다.
파산 후 화려하게 재기한 그는 가난한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교도소 수감자에겐 사회에 복귀할 수 있게 구원의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사업 실패 후 재기하기까지 겪은 쓰라린 삶의 경험과 봉사의 보람을 기록하기 위해 글쓰기 공부를 시작, 5년 만에 수필가로도 등단했다. 그는 요즘 기업 운영보다 수필을 쓰는 게 더 자랑스럽다고 한다. 이 대표의 사업재기 성공담과 저술활동, 봉사활동 등에 대한 얘기를 들어봤다.

 

실패와 재기로 점철된 삶을 돌아보며
장학금 지원과 수감자 교화 봉사활동
작가로서의 삶도 모두에게 권하고 파

가스버너 폭발로 회사 도산
“농고와 농대에서 농기계를 공부한 것만으로는 크게 출세하기가 어려울 것이라 판단하고 건설기계분야로 진로를 바꿨습니다. 동아건설에 입사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중장비 분야를 맡아 일했어요. 이후 세계적인 중장비 제조회사인 캐터필러의 사우디 주재원으로 스카우트 됐습니다.”
그는 결혼 후 국제종합상사에서 기계 수입을 담당하며 후한 대우와 순탄한 봉급생활로 돈을 많이 모았다. 1989년 퇴직한 그는 몸담았던 회사의 사장과 동업으로 산업용 가스버너 제작회사를 창업했다.
대형공장에 가스버너를 납품하고 가설하는 회사였는데, 설비공의 실수로 인명피해가 동반된 대형가스폭발이 발생해 창업 1년 만에 파산하고 말았다. 화재와 폭발을 예상치 않은 게 화근이었다. 중동에서 모은 돈을 다 잃고 집까지 팔고도 빚쟁이에 쫓기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건설장비 제조사업으로 화려한 재기
“저는 딸 둘을 뒀는데, 사업에 실패했을 때가 첫째는 초등학교 3학년, 막내는 1학년이었어요. 하루는 집에서 청소를 하다가 막내딸이 쓴 일기장을 봤어요. ‘어제도 아빠를 찾는 빚쟁이 아저씨가 찾아왔다. 아빠는 왜 바보사장이 됐을까?’라는 글을 읽고 눈물을 많이 흘렸어요.
그 일기를 본 뒤 마음을 추스르고 특장차를 만드는 회사에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서 집 거실을 사무실로 꾸미고 기계수출업을 하며 돈을 모았어요. 그 돈을 밑천으로 1998년 중장비 제조·수출 전문벤처기업인 ‘파워킹’을 설립했지요. 건설기기 중 특히 돌을 깨는 브레이커, 할암기, 락드릴 등 3종의 대표상품을 개발·제작했습니다.

우리나라는 땅을 30㎝만 파도 돌이 나오다 보니 이들 장비의 국내 수요가 많지만 99%를 수출하고 있어요. 최근엔 고압노즐로 수도관 내벽에 물때를 세척하는 수도관 내벽세척기를 개발해 세척용역을 발주 받아 일을 하고 있는데, 앞으로 전국으로 수주가 확대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이순형 대표는 절벽에서 떨어졌다가 이처럼 재기에 성공했다.

장학금 지원, 수감자 구원봉사에 보람
그가 생활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게 된 동기는 봉사가 무엇보다 의미 있는 삶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업에 실패하고 헤맬 때였어요. 과천 남태령고개를 넘어오는데 성당이 보이는 거예요. 과천에 살며 10년을 넘게 남태령고개를 넘었는데 성당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어요. 하나님이 정말 있는지 묻고 싶어서 무작정 성당에 들어갔어요. 기도실의 예수상 앞에서 고해도 하고, 호소도 하고, 욕도 하며 3~4시간을 울었어요. 그러고 나니 기분이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매일 갔어요. 그렇게 8개월을 다녔는데, 어떤 분이 성당 내에 여러 봉사단체가 있다면서 가입을 권유하더군요. 그래서 세례를 받고 봉사에 나서게 됐어요.”

그는 봉사활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나눔과 봉사의 의미를 알게 됐고, 가장 먼저 장학금 지원을 시작했다.
이순형 대표는 경기도 수원의 광교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종손으로서 어려운 이들을 음양으로 도왔고, 가난한 아이들의 학비도 내줬다고 한다.

“저는 수원북중을 다녔는데, 그때 내가 좋아하던 친구가 수학시험에서 1등을 했어요. 이 친구는 집이 수원역 근처의 우범지역에 살았고, 날품 파는 편모 밑에서 자라다보니 불량배들과 휩쓸려 다니다가 끝내는 죄를 짓고 교도소에 가게 됐어요. 출소 후 다시 재범으로 수감되는 거를 보고 장학금 지원을 시작했죠. 10년간 130명을 도운 것 같아요. 장학금으로 2억5천만 원을 냈는데, 내 형편엔 과했다고 볼 수 있죠.(웃음) 입시생들의 서적 구입비로 연간 300만 원을 지원했어요. 장학금을 받은 학생은 취직이나 결혼한다고 인사를 오기도 하고, 명절에도 인사를 오는데 반갑기 그지없지요.

사업보다 장학지원은 재미와 기쁨이 더 커요. 교도소 수감자의 구원 봉사지도는 주로 안양교도소로 갑니다. 선교차원으로 가는데, 천주교 신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성경말씀과 기도 후에 가지고간 음식을 나눠먹고 얘기를 나눕니다. 이들은 대개 전과 3범으로 편부·편모 슬하나 고아들이 대부분이며 학력도 낮아요. 그들이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교도소에 다시 들어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에 교도소 내 검정고시학원 진학을 종용합니다. 제 눈에 띄는 사람은 따로 면회해 명심보감과 노트를 사주고, 노트에 명심보감을 써서 저에게 소포로 보내라고 말합니다. 일종의 정신수양을 시키는 거죠. 명심보감을 써서 저에게 보냈던 사람들 중에는 출소 후 막노동을 할지라도 신기하게도 교도소엔 다시 안 가게 되더라고요. 바르게 사는 모습을 보면 무척 기쁩니다.”

삶 가다듬는 글로 수필가 등단
그는 봉급생활 중 30여 개국 출장이나 여행을 다니며 비행기 안에서 메모한 것을 과천신문에 ‘서방견문록’이란 코너로 기고를 했다. 그 글을 묶어 2010년 책을 냈고, 2013년에는 재판을 냈다. 그 후 사업 실패와 재기의 삶에서 얻은 교훈을 소재로 수필을 쓰려고 전문작가의 도움으로 5년간 글쓰기 공부를 했고, 2010년 ‘계간수필’에 ‘월급봉투’란 제목의 수필로 등단했다. 그 후 틈틈이 쓴 수필을 모아 ‘월급봉투’란 이름의 수필집을 냈다.

“수필을 쓰는 것은 인생을 가다듬고 기록하는 작업입니다. 독자 여러분도 잠자리에 들기 전에 조용히 책을 읽고 일기를 써보길 권합니다. 그리고 남을 돕는 일을 하면 많은 보람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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