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철 충남연구원 사회통합연구실장

"농촌 지역 면 소재지에
최소한 어르신들을 위한
물리치료소를 하나씩
만들 수는 없을까.
미안함과 감사함이
더 깊어가는 5월이
또 이렇게 지나간다."

▲ 박경철 충남연구원 사회통합연구실장

가정의 달인 5월도 다 지나간다. 감사와 미안한 마음들이 전해지고 또 전해 받는, 그래서 우리 사는 세상이 좀 살갑고 온기가 느껴지는 때가 5월이 아닌가 싶다.
우리 가족은 5월의 첫날을 아버지 제사로 맞는다. 아버지는 평생 농사를 짓고 사셨는데 공교롭게 ‘근로자의 날’이 기일이 됐다. 이 날만이라도 편히 쉬라는 뜻이었을까. 매해 근로자의 날이라서 가족들이 제법 모이는데, 작년부터는 코로나19로 인해 많이 모이지 못했다. 그래도 제사상에 올라가는 음식들은 그대로다. 남편을, 그리고 아버지를 일찍 보낸 어머니와 자식들은 미안한 마음에 음식을 하나라도 더 올린다. 

아버지는 52세에 세상을 떠나셨다. 공교롭게 올해 내가 그 나이가 되다 보니 아버지께서 너무 일찍 떠나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으로서 죄스러운 마음뿐이다.
아버지는 많지 않은 농토로 여섯 자식을 키우기 위해 쉴 틈 없이 일하셨다. 논밭이 적었기 때문에 농지를 임차해 농사를 늘렸다. 늘린 농토에는 수박, 고추, 무, 배추, 땅콩, 담배 등을 심었다. 어렸을 때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방을 집에 던져놓고 밭에 먼저 나갔다. 그래서 부모님과 함께 일을 하고 해질녘에 함께 돌아오곤 했다.

아버지는 농사만으로는 여섯 자식을 다 키우기가 어려웠는지 농사지은 수확물을 직접 판매하기 시작했다. 작업해 간 농산물이 잘 팔리면 빨리 내려오셨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며칠이 지나셔야 내려오셨다. 그 며칠 동안 아버지는 차 안에서 주무시기도 하고 시장 내 상회 한구석에서 주무시기도 하셨다. 숙식이 불편하고 불규칙적이다 보니 아버지의 몸은 그렇게 상하기 시작하셨다.
그래도 서울에 다녀오신 아버지 손에는 늘 자식들에게 줄 선물이 들려있었다. 자식들은 속도 모르고 서울에서 사온 아버지의 선물을 좋아했다.

아버지께서 떠나실 때 어머니는 51세였다. 아버지 삶의 짐은 고스란히 어머니에게 전해졌다. 어머니는 혼자 자식 여섯을 키워 모두 시집, 장가를 보냈다. 어렸을 때 본 어머니의 모습은 늘 분주히 움직이셨고 늘 머리에 뭔가를 이고 계셨다. 어머니의 머리 위로는 못 올라가는 게 없었다. 봄에는 새참거리가, 여름에는 수박이, 가을에는 무와 배추가, 겨울에는 땔감나무 등을 이어 날랐다. 그렇게 세상의 모든 짐을 머리에 이고 세월과 삶의 무게를 견뎌내셨다. 공교롭게 올해 아내의 나이가 51세다. 도시에서 대부분을 산 아내는 어머니의 신산했던 삶을 이해할 수 있을까.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43살에 한국에 돌아와서 보니 어머니의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는 더욱 악화돼 있었다. “오빠의 박사학위는 엄마의 무릎과 바꾼 거여”라는 동생들의 말이 내 가슴을 후벼 팠다. 장남이 일찍 사회에 나가 동생들을 돌봐줄 줄 알았는데, 공부한다고 돌아만 다녀 서운해한 어머니의 마음을 동생들이 에둘러 그렇게 표현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늘 나의 길을 지지해주셨다.

어머니는 젊은 시절 몸을 혹사하다 보니 비교적 이른 나이에 무릎에 무리가 와서 지금은 걷는 것조차 힘들어하신다. 그래도 농사는 포기하지 못하고 늘 밭에 나가신다. 면 소재지에 하나 있었던 물리치료소도 없어져 일주일이면 두세 번은 인근 면의 정형외과에 가서 물리치료를 받으면서도 농사일은 놓지 못하고 계신다. 자식들은 농사일을 줄이라고 해도 잘 듣지를 않는다. 그 고집이 있었기에 우리 가족이, 삶이, 고향이 지탱해 왔다는 것도 잘 안다. 농촌지역 면 소재지에 최소한 어르신들을 위한 물리치료소를 하나씩 만들 수는 없을까. 미안함과 감사함이 더 깊어가는 5월이 또 이렇게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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