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요칼럼

홍 종 운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 토양학 박사
본지 객원대기자

 

내가 어렸을 때 살던 곳은 산골의 어느 작은 마을이었다. 당시 우리 마을엔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다. 나라 전체가 가난했던 때였으니 어느 마을 어떤 가정이 가난하다는 게 흉이 아니었다.
그때 시골의 가정들은 한결같이 가난했지만 가정마다 아이들 복은 많았다. 아이들 열 명 정도를 낳는 부인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들 가운데 첫 돌을 넘기지 못하는 경우 또한 비일비재했다. 이제 생각해보니 가난해서 영양실조가 되는 경우도 많았고, 의료서비스가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 사소한 병이 죽음까지 이르게 되어 그랬을 것이다.

 

아이들 굶기지 않았던 창말댁
그 때 우리 마을에 창말댁이라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창말이라는 동네에서 우리 마을로 시집을 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 창말댁은 아이들 열 명을 낳았는데 그 가운데 넷은 돌은 넘기지 못했다. 나머지 여섯 아이들은 별 탈 없이 자랐다. 그 아주머니는 성격도 좋고 일솜씨도 좋았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의 남편은 체구가 건장해서 일도 잘 했지만 겨울이 되면 술을 즐겨 마시고 도박으로 날을 지새우다시피 했다. 그러니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니게 됐다. 창말댁의 남편은 여름에 일해서 버는 돈으로 노름빚을 갚기에 바빴다. 그러니 아이들을 굶기지 않는 일은 그 창말댁의 몫이 됐다.
창말댁은 어떻게 그 막중한 일을 감당 했을까? 우선 그분의 좋은 성격과 좋은 일솜씨가 그 어려운 일을 감당할 수 있게 했다. 멀고 가까운 마을에 큰일을 치루는 집을 찾아다니며 일을 거들어 주었고 그 대가로 아이들 끼니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일을 거들어 주고 아이들에게 점심밥을 두둑하게 먹이면 저녁과 아침은 대충 먹여도 됐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동내 아주머니들이 창말댁에 대해 하는 말을 어께너머로 들었다. “창말댁은 아이들 밥 얻어 먹일 때, 이 아이 저 아이 배를 손가락으로 꾹꾹 찔러가며 먹인대.” 그러면서 아주머니들은 까르르 웃곤 했다. 철부지였던 나는 그게 흉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나이 70이 되고서야 창말댁의 지혜로움을 깨닫게 되었다. 창말댁은 왜 아이들의 배를 손가락으로 찔러보아가며 밥을 먹였을까? 여섯 명의 아이들에게 밥을 고루 먹이자니 어떤 아이가 밥을 충분히 먹었는지 어떤 아이가 밥을 덜 먹었는지를 알아야 했을 것이다. 창말댁은 아이들의 배를 찔러보는 방법으로 아이들의 밥 먹은 정도를 진단(또는 검정)했던 것이다. 얼마나 과학적인가? 그 속내를 모르는 이들은 그 아주머니의 과학적 방법을 웃음거리로 여겼다. 오늘 우리들도 그 창말댁을 비웃는가? 우리는 아마도 창말댁을 직접 비웃지는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 창말댁을 비웃듯이 행동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농토에 이런 것 저런 것을 투입할 때, 그 농토에 그런 것들이 충분히 들어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따져보고 주는가? 질소, 인산, 가리 같은 비료는 말할 것도 없고, 무슨 미생물, 무슨 효소, 무슨 미네랄, 무슨 미량원소 같은 걸 줄 때 그 논이나 밭 흙에 그런 것들이 이미 충분히 들어 있는지를 따져보고 주는가? 십중팔구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사실은 우리나라 농지의 흙은 매우 좋아서 질소, 인산, 가리 이외에 이런 저런 것들을 일부러 보태주지 않아도 될 경우가 많다. 특히 시설재배지의 경우에는 흙에 인산과 가리도 매우 많이 들어 있는 경우도 많다.

 

위기를 반전시키는 지혜
이 어려운 시기에는 꼭 해야 할일만 하기도 벅찰 것이다. 이런 때에 하물며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할 것인가? 창말댁의 지혜를  배우면 얻는 게 많을 것이다. 창말댁이 쓴 아이들 배 찔러보기와 토양검정은 방법은 다르지만 그 목적은 같은 과학기술이다. 나는 우리나라 농촌에 창말댁 같은 분들이 많을 것으로 믿는다. 이런 때 그런 분들이 더 분발하셔서 우리 농업의 과학화를 한 단계 더 높여줄 것을 기대한다. 그렇게 된다면 위기가 기회란 말이 참임을 드러내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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