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옛날의 트로트- 노래의 고향을 찾아서

<47> 남일해의 노래

1960년대는 우리 대중문화의 기초가 마련된 시기였다. 6.25전쟁의 상처가 표면적으로는 아물기 시작하고, 경제개발계획으로 도시화가 빠르게 이뤄졌다.
문화면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TV방송을 포함한 민영방송국의 개국이었다. 1961년 문화방송(MBC), 1963년 동아방송(DBS), 1964년 동양방송(TBS)이 개국됐다. 아울러 텔레비전 방송도 시작됐다. 1964년 동양방송을 시작으로 1969년 문화방송이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해, 1960년대 말에는 KBS까지 세 개의 채널이 자리잡게 된다.

또한 <선데이 서울>등 가판 상업주간지 시대가 열리고, 본격적인 LP시대가 구축되면서 한국음반산업의 도약이 이뤄졌다. 그런가 하면 장편영화가 연간 200여 편씩 제작되며 전성기를 구가하고, 라디오 방송극·TV 드라마가 서민들의 안방을 지배하는 오락으로 자리잡았다. ‘안방극장시대’의 출발이다.
그런 연유로 이 무렵 대중가요팬들이 좋아하던 노래들은 거의가 방송 드라마 주제가였다.

그런가 하면, 강하고 무뚝뚝한 남성 취향의 노래들이 인기를 얻으면서 최숙자·이미자·조미미 류의 ‘눈물’, ‘청승맞음’으로 대표되는 전통 트로트를 밀어냈다. 그렇다고 트로트양식이 전혀 배제된 건 아니었다.
최희준의 <맨발의 청춘>, 남일해의 <맨발로 뛰어라>가 대표적인 노래다.

 

▲ <맨발로 뛰어라> 앨범재킷

      <맨발로 뛰어라> (1절)

내 몸에 핏줄이 비바람에 젖어도
멍들은 상처를 건드리지 말아다오
사나이 얼굴에 눈물이 비쳐도
님 그린 내 순정 변함은 없다
쫓기는 이 세상을 맨발로 뛰면서
끓는 피 두 주먹을 쥐고 또 쥐고
어두운 그림자 밝은 내일 믿고서
성내고(성내고) 뛰어라(뛰어라)
맨발로 뛰어라

                  (1964, 유호 작사/ 이봉조 작곡)

 

▲ 남일해 최고·최대 히트곡 <이정표> 노래비(파주 기독교공원묘지에 있는 작사가 월견초 묘역에 세워져 있다.)

인생을 바꿔준 최고 히트곡…<이정표>
남일해(南一海, 본명 정태호)는 대구에서 태어나 대건중·고교를 나왔다. 1938년생이니 올해로 만 83세다. 우리 가요계에서 생존 현역가수로서는 나이 많기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원로가수다.
아직도 <가요무대> 방송이며 각종 행사에 초대돼 호흡·가창에 큰 무리 없이 자신의 왕년 히트곡들을 거침없이 흥나게 불러제끼는 짱짱한 현역이다.

어린 나이부터 노래에 타고난 끼가 있어 주위 권유로 등 떠밀리듯이 고교 3학년 때인 1954년 대구 대도극장에서 열린 오리엔트레코드사 주최 신인가수 선발 콩쿠르에서 특등으로 입상해 가요계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원래 최고상은 1등상이었는데, 남일해의 노래실력이 워낙 뛰어나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예정에 없던 특등상을 만들고, 부랴부랴 특등상 트로피와 상장을 새로 준비했다는 에피소드도 전해 온다.
이때 레코드사 사장이 작곡한 <추억의 오동도>, <애상의 부루스>란 노래를 취입해 내놨으나, 기대 만큼의 호응은 얻지 못했다.

▲ 첫 데뷔곡을 작곡해 준 라화랑 작곡가와 함께. <이정표>도 그가 작곡했다.

그 뒤 1년 동안 각고의 노래공부를 하고 상경, 1959년에 작곡가 라화랑의 곡 <비 내리는 부두>로 가요계에 정식 데뷔한다.
그리고 그 2년 뒤인 1961년에 내놓은 <이정표>가 남일해의 위상을 완전히 뒤바꿔놨다. 간간 경상도 사투리가 씹히는 중저음의 매혹적인 목소리는, 틀에 박힌 ‘뽕짝’에 길들여졌던 가요팬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단숨에 스타고지에 올라섰다.

 

         <이정표(里程標)>

1. 길 잃은 나그네의 나침반이냐
   항구 잃은 연락선의 고동이더냐
   해지는 영마루 홀로 섰는 이정표
   고향 길 타향 길을 손짓해 주네

2. 바람 찬 십자로의 신호등 이냐
   정처 없는 나그네의 주마등 이냐
   버들잎 떨어지는 삼거리의 이정표
   타 고향 가는 길손 울려만 주네

           (1961, 월견초 작사/라화랑 작곡)

 

남일해의 모든 노래 중에서 최대 히트곡으로 꼽는 노래다. 남일해에게 데뷔곡 <비 내리는 부두>를 만들어줬던 작곡가 라화랑은, 데뷔 이후 줄곧 블루스곡을 불러온 남일해의 노래 스타일을 바꿔보자는 의도로 <이정표>를 만들어 줬다.
예감은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당시로서는 밀리언셀러에 견줄 만한 7만 장의 음반 판매기록을 세웠다. 훗날 남일해는 2020년 12월에 출판된 <이정표> 작사가 월견초의 노래시집 《청춘을 돌려다오》에 존경의 마음을 담은 ‘추천사’를 올리기도 했다.

“월견초 형은 내 은인입니다. 견초형의 <이정표>가 당시 골목마다 거리마다 나오고 크리스마스엔 캐롤을 대신할 정도로 대인기였습니다. 이 노래는 나를 최고의 가수로 만들어 줬습니다.
1962년부터 1964년까지 3년 내내 가수왕 자리를 지켜준 <이정표>. 이 노래는 내 가수인생을 바꿔준 귀한 노래랍니다.”

‘남일해=빨간구두 아가씨’의 등식
그러나, 그럼에도 1963년에 내놓은 도돔바리듬의 <빨간구두 아가씨>가 남일해의 대표히트곡으로 뛰어올랐다.

 

        <빨간구두 아가씨>

 1. 솔솔솔 오솔길에 빨간구두 아가씨
   똑똑똑 구두소리 어딜 가시나
   한번쯤 뒤돌아 볼만도 한데
   발걸음만 하나 둘 세며 가는지
   빨간구두 아가씨 혼자서 가네

2. 밤밤밤 밤길에 빨간구두 아가씨
   똑똑똑 구두소리 어딜 가시나
   지금쯤 사랑을 알만도 한데
   종소리만 하나 둘 세며 가는지
   빨간구두 아가씨 멀어져 가네

            (1963, 하중희 작사/김인배 작곡)

 

작사가 하중희가 남산 중앙방송국(KBS전신) 언덕길을 올라가는데, 앞서가는 빨간구두 아가씨를 보고 영감을 얻어 후다닥 노랫말을 써서 중앙방송국 악단장으로 있던 김인배에게 건네줬다고 한다.
빨간색의 강렬한 시각이미지와 똑똑똑 구둣소리의 건강한 청각이미지, 그리고 향긋한 분냄새라도 풍길 듯한 아가씨의 후각이미지까지…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은 노랫말 이미지에, 투박한 경상도 사내의 매혹적인 저음까지… 이 노래는 <이정표>의 인기를 잊게 했다.
‘남일해=빨간구두 아가씨’의 등식이 됐다.

“고향 ‘대구의 노래’ 만들어 부르는 게 마지막 꿈”
우리 노래판에서 원로가수 남일해는, ‘정·의리의 사나이’로 각인돼 있다.
동료, 선·후배 가수의 아픔을 그냥 보고 지나치질 못한다. 그중 대표적인 사례가 이미자와 금사향의 경우다.

옛 화신백화점 5층 카바레에서 무명가수로 노래하던 이미자의 노래를 듣고 ‘제대로 크라’고 작곡가를 소개해 줬고, 우정 이미자와 같이 <우리 둘은 젊은이>라는 음반도 냈다.

▲ KBS <가요무대> 방송시간 단축 항의방문

금사향의 경우는, 금사향의 불우한 만년의 처지를 보고 사는 집을 개수해 주고, 퇴행성관절염 치료를 해줘 귀감이 됐었다. 한때 <가요무대>방영시간을 10분 줄인다는 얘기를 듣고 KBS에 항의 방문한 적도 있다. 후배가수들을 위해서.

그는 1967~1982년까지 (구체적 이유는 모르겠지만) 미국으로 이민 가 있던 15년 세월을 제외하고는 무대를 떠나본 적이 없다.
그가 한창 톱가수의 자리에 있었던 1960년대 중반에는, 역시 당시 최고 인기 여가수였던 박재란과 함께 《남일해·박재란 쑈쑈쑈》단을 구성해 전국 극장쇼를 화려하게 장식하기도 했다. 그는 지방 극장주들이 비행기를 전세내 모셔갈 정도로 귀한 VIP대접을 받았다.

그는 공식 데뷔 이후 <이정표>, <빨간구두 아가씨>로 스타가수가 된 후에도 꾸준하게 노래를 발표해 정상을 고수했다. 정상에 오르기보다 그 정상을 지키기가 더욱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맨발로 뛰어라>, <낙엽의 탱고>, <축배의 노래>, <첫사랑 마도로스>, <메리켕 부두> 등의 노래들로 꾸준한 인기를 얻었다.

특히 그는 자신의 가수활동 외에도 가수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앞장서면서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장을 맡아 고군분투 하기도 했다.
구십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옹골찬 꿈이 그에겐 하나 있다. 서울(서울의 찬가)·부산(돌아와요 부산항에)·목포(목포의 눈물)·대전(대전블루스)처럼 자신의 고향- ‘대구의 노래’를 만들어 불러보는 것이다.
그의 ‘첫사랑-가수’의 꿈을 키워주고, 그 꿈을 이루게 해 준 곳이 고향 대구였으니까. 꿈은☆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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