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자수필- 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봄날엔 마음으로 생각하던
사랑의 고백과 설렘들을
꽃처럼 피워 볼 일이다..."

현관문을 열면 톡 쏘는 짙은 향기 뿜어 온 마당에 어지럼증을 일으키는 자둣꽃, 발길따라 종지나물, 제비꽃들이 부드러운 미풍에 연보랏빛 물결치고 풀잎 간지러운 봄길에 4월의 사랑이 부풀어 오른다. 새벽 한기에 냉해를 입을까 조마조마 하는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얗게 과수원을 물들이는 배꽃의 화사함이 눈을 시리게 한다. 뒷산자락 무리지어 핀 조팝꽃은 흐리다가 갠 푸른 하늘을 향해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영롱하다. 아직도 갈아엎지 못한 사래 긴 밭고랑엔 연노랑 옷을 입은 냉이꽃이 여리여리 피어올라 헤프게 몸 푼 소문이  밭이랑마다 넘쳐난다. 짝 찾는 산꿩 소리, 어린 날의 연서(戀書) 같이 몽글몽글 벙그는 연둣빛 산골짝, 강 건너 물가는 갖가지 풀빛으로 물들고, 강물에 떨어진 푸른 산 그림자가 청록의 강물로 번진다.

봄마다 목이 길어진다. 진달래 움트는지 보려고 산속을 기웃거린다. 메마른 풀숲 사이에서 봉긋봉긋 꽃봉오리 발견, 아! 꽃 가지가지마다 적당한 여백을 지니고 하늘하늘 피어 송이송이 어우러진 연분홍 자태가 더 없이 순결하다. 습진 응달, 깎아지른 절벽 위에서 겨울을 보낸 진달래는 꽃망울인가 싶더니 어느 순간 산허리를 발갛게 물들인다.
산 구석 어둔 응달도 가리지 않고 봄은 어느새 깊숙이 들어와 있다.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살아있다고 말 걸어 달라고 종알대고, 바람 따라 어디론가 가고픈 4월, 롤러코스터를 타고 울렁거리는 것처럼 속절없이 내 마음이 봄을 따라 울렁인다.

4월을 되뇌면 파아란 이파리가 돋아난다. 하루도 같은 날이 없는 어제와 또 다른 4월의 드라마, 빈 마음만 있어도 4월엔 내내 초대받은 손님이 된다. 앉은뱅이 노란 민들레꽃밭에 자리 펴고 누워 봄볕 안아보는 기쁨으로 나른하다. 하늘엔 구름 한 점이 느리게 한 생애의 머리 위를 지나간다. 흙덩이 위로 지렁이 한 마리 꿈틀대며 기어가고, 햇볕에 피 말리며 ‘아! 목마르다. 4월은...’ 

4월엔 내내 편지를 기다린다. 봄바람 뿌옇게 서성이는 목련나무 아래서 더는 참지 못해 진저리 치며 꽃은 피어나는데 아직 살아있는가 베르테르여! 낯선 우편번호 적어 어디로 보냈는가~ 꽃잎은 하염없이 떨어지고 안부도 모르는 채 4월은 가고 있다. 
중학교 교과서에 내 대학시절 은사였던 오탁번 시인이 쓴 수필이 생각난다. 중학교에 갓 입학한 딸아이의 열린 가방에서 예쁜 꽃봉투를 발견하고 짐작만 하고 있는데, 저녁을 먹고 제 방에서 나와 딸이 “부반장 친구가 준 편진데, 이게 무슨 말이냐?”고 아빠에게 물어왔다.

“외계인이 쓴 것 같지 않아?” “글쎄, 중요한 내용일수록 암호를 쓰는 법이거든. 아빠가 한 번 알아볼까?”
내용이 더 궁금해서 찾아보니, 부끄럼 많은 소년이 좋아한다는 자기 맘을 모스 부호를 써서 고백한 내용이었다. 그 글에서 오탁번 시인은 소년의 두근거리는 처음 고백을 고민 끝에 모스 부호로 쓴 것에 대해, 우리 글로 쓸 수 없을 만큼 수줍고 진심어린 순결함을 칭찬했었다.

흐려지면서 또렷해지고, 지워지면서 선명해지는 기억,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살아나는 체온이 있다. 찌릿한 느낌도 있다. 추억에 물방울이 번지면서 몰래 뭉클해지는 4월의 늦은 오후엔 물을 뿌리면 다시 살아나는 레몬글씨처럼 부치지 않을 편지를 길게 써본다.

저작권자 © 농촌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