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를 자랑합니다 - 경기 시흥 홍정기 회원

인생이란 무대에서 주인공은 바로 나 자신이다. 모든 이들에겐 나만의 역사가 있고 스토리가 있을 터. 전국 10만 생활개선회원들 역시 전국 각지에서 각자의 인생을 일구며 쌓아올린 10만개의 이야기가 있다. 이에 본지는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들을 직접 만나봤다.

▲ 홍정기 회원은 어디서나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신한복이 널리 퍼졌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행복 짓는 마음으로 한복과 인연이 어느덧 40년
패션으로 승화한 신(新)한복…새로운 인식 전파에 노력

중국의 샤오미가 스마트폰 배경화면에 한복을 ‘중국 문화’라고 소개해 이른바 한복 왜곡논란으로 한동안 시끄러웠다. 김치논란에 이어 잇따른 중국의 이같은 억지주장은 우리가 왜 선조들로부터 이어받은 전통복식문화인 한복을 후대에게 물려줘야 하는가를 깨닫게 해주는 일이었다. 경기 시흥의 홍정기 회원 역시 고유의 한복문화를 후대에게 물려주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먹고 살기 위한 선택
“처음엔 두 딸과 먹고 살기 위해 한복을 선택했어요.”
그와 한복의 첫 인연은 말처럼 빈 손으로 시작할 수 있는 일이 그 당시엔 한복뿐이었었다. 학원과 내로라하는 한복집에서 밤낮으로 배운 한복과 함께 한 세월이 40년이 다 돼가는 홍정기 회원. 시흥에서 ‘한올’이란 한복집을 수십년간 운영하며 지역에서 한복의 명맥을 잇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고. 한복에만 인생을 바치다시피 했었기에 생활개선회 가입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한 5~6년 전쯤에 생활개선회에 가입했어요. 전통주에 관심이 있었는데 농업기술센터에서 마침 그 교육을 한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회원이 됐죠. 한복에 관심있는 회원들도 있어 이것저것 알려주기도 하고 그랬죠.”

한복이란 게 대개 결혼이나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 입는 옷이 아니던가. 그래서 남들이 한번이나 두 번 박음질할 것도 그는 세 번 하며 최선을 다했다. 시간은 더 걸렸지만 그만큼 행복을 짓는 마음으로 만들었다는 그에게서 쉽지 않았을 명장의 기운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도 코로나19의 파고를 넘지 못했다. 조금씩 사양길로 접어든 한복이었건만 코로나19 마저 덮치며 결혼식을 비롯한 행사들이 줄줄이 취소되며 자연스레 한복주문도 줄어들게 됐다.

신한복에 주목하자
어쩔 수 없이 폐업을 결정했다는 그는 최선을 다해 후회없이 다해왔지만 그래도 자식만큼 애정을 쏟은 한복과의 인연이 끝나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한복과의 인연이 완전 끝이 난 건 아니다. 전통한복을 패션으로 승화한 신한복을 최대한 알리고 싶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신한복은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 평상복으로 입어도 불편함이 없고 외출복으로도 전혀 손색없는 옷이라 그는 자부한다.

“철릭이란 한복이 있어요. 고려 때부터 장군들이 사냥이나 전쟁 때 입었던 것인데 그냥 보면 예쁜 원피스 같은 느낌이에요. 연꽃축제로 유명한 연성문화제 때 신한복 패션쇼를 했었어요. 처음 본 분들은 저게 무슨 한복이냐는 말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한복이 이렇게 이쁜 옷인 줄 몰랐다고 하셨어요. 입기 불편하고 요즘 취향에는 맞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이 그때 많이 깨지셨을 거에요.”

신한복을 연구하고 앞장서 홍보하고 있는 신한복디자인연구소의 이사직도 맡고 있는 홍정기 회원은 연성문화제 때 패션쇼를 본 사람들처럼 한복에 대한 잘못된 편견이 깨지길 바라고 있다. 그리고 한복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이 퍼질 수 있도록 하는데 힘을 보태고 싶다는 게 그의 바람이다.

“예전엔 반팔로 된 한복도 입었고, 구하기 쉬운 무명으로 만들기도 했어요. 격식을 차리고 입기 불편하기만 한 옷이 아니라 다양한 디자인과 소재로 만들었어요. 조상님들의 자랑스러운 한복문화가 대대로 이어지려면 특별한 때나 특별한 사람만이 입는 옷이 아니라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옷이 돼야 한다고 믿어요.”

그의 바람이 나비처럼 날아오르듯 패션으로 승화한 한복이 우리의 생활곳곳에서 퍼졌으면 한다. 거기서 그의 제2의 인생도 다시 날아오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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