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옛날의 트로트- 노래의 고향을 찾아서

▲ <남원의 애수> 배경이 된 광한루(남원)

<46> ‘만요가수’김용만의 노래들

매주 월요일 밤 10시에 방영되고 있는 KBS-1TV의 <가요무대>가 첫 방송된 건 1985년 11월4일이다. 올해로 만 36년째 전파를 타고 있다. 지난 3월29일 1705회가 방송됐다.
이 프로를 볼 때마다 아직도 현역으로 이따금씩 출연해 노익장을 과시하는 원로가수들을 보면서 경외감을 갖곤 한다. 그 연세에…하며.

<사랑이 메아리 칠 때>, <바닷가에서>를 부른 로맨스그레이 노신사 안다성(1931년생·만 90세), <남원의 애수>, <효녀 심청>, <회전의자>를 부른 김용만(1933년생·만 88세), <백마야 울지마라>, <방랑시인 김삿갓>을 부른 명국환(1933년생·만 88세), <첫사랑 마도로스>, <빨간구두 아가씨>의 가수 남일해(1938년생·만83세), <추풍령>을 부른 남상규(1938년생·만 83세), <뜨거운 안녕>의 쟈니 리(1938년생·만 83세), <산너머 남촌에는>, <님>을 부른 박재란(1940년생·만 81세) 등.

이중에서 노래만큼은 예전 전성기 때의 구수한 가창이나 웃음을 자아내는 익살스러운 몸짓, 그리고 노래의 맛을 거의 흐트러짐 없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원로가 김용만이다.
그 덕에 두달에 한 두번 꼴은 <가요무대>를 통해 아득한 50년 전후의 옛노래에 흠씬 젖어볼 수 있는 즐거움을 맛본다.

▲ <남원의 애수> 노래비(남원 광한루 옆 관광단지)

19세 때 <남원의 애수>로 데뷔…“제일 애착 가”
김용만(金用萬)은 1953년, 열아홉 살의 나이에 <남원의 애수>란 노래로 가요계에 정식 데뷔했다. 고전 《춘향전》의 서사적 스토리가 이 노래의 주제다. 사랑과 이별, 그리고 권선징악…

 

▲ <남원의 애수> 앨범재킷

               <남원의 애수>

1. 한양 천리 떠나간들 너를 어이 잊을소냐
   서낭당 고개마루 나귀마저 울고 넘네
   춘향아 울지마라 달래였건만
   대장부 가슴속을 울리는 님이여
   아~어느 때 어느 날짜 함께 즐겨 웃어보나

2. 님께 향한 일편단심 채찍아래 굽힐소냐
   옥중에 열녀 춘향 이도령이 돌아왔네
   춘향아 우지마라 얼싸안고서
   그리는 천사만사 즐기는 님이여
   아~흘러간 꿈이련가 청실홍실 춤을 추네

                          (1953, 김부해 작사/ 김화영 작곡)


우연찮게 친구가 일하고 있는 악기점에 놀러 갔다가 작곡가인 김화영을 만난 것이 인연이 돼 <남원의 애수>를 어렵사리 취입했고, 이 노래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히트를 해 무명의 김용만을 스타가수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피아노가 흔치 않던 시절, 남의 피아노를 빌려 하루 1시간씩 사흘 연습한 후에 취입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제일 애착이 가는 노래”라고 했다.

이 한 곡을 들고 전국을 유랑하고, 그 열기가 채 식기도 전인 1957년, 이번엔 《심청전》을 테마로 한 <효녀 심청>(강남풍 작사/ 전오승 작곡)이 떴다. 가수로서의 탄탄대로가 훤히 열리듯 보였다.
그리고 뒤돌아볼 새도 없이 <청춘의 꿈>, <생일 없는 소년>이 히트의 대열에 줄잇듯 들어섰다. ‘매일이 이 날만 같아라’였다.

“노래는 아버지에게서 받은 유전자”
김용만은 서울 종로가 고향이다. 여러해 전 한 방송에 출연해 그의 입으로 털어놓았던 ‘가족사’ 얘기를 들어보자.
“겨우 밥 먹을 정도의 집안에서 10남매 중 중간치기로 태어나 천방지축 동네 개구장이로 자랐다. 지금도 머리엔 열네댓군데 상처가 있다. 문밖에 나가면 으레 애들과 쌈박질을 하도해서… 아버지는 술과 노래(경기민요)를 좋아해 밤낮 들었지만, 내가 아홉살 때 돌아가셔서 이렇다 한 정이 없다. 무학자로 문맹이셨던 어머니가 가진 것 없이 그 많은 자식들 어떻게 해서든 다 먹이고 입히고 해서 키웠다. 어머니는 밥상 밑에 자식들이 흘린 밥알갱이를 주워 드시기 다반사였다.

늘 집에서 듣던 아버지 노래를 귀에 익혀 음정 박자 상관없이 내 맘대로 하모니카로 불면서 동네 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어쨌거나 노래는 아마도 아버지에게서 받은 유전자였던 것 같다.”
그의 구수한 옛이야기 또한 노래를 듣는 듯하다. 천하에 흥 많고 재주 많다고 알려진 그다. 특별히 음악공부를 한 적도 없는데, 그는 노래에 관한 한 만능 엔터테이너가 돼가고 있었다. 지방공연 다니는 짬짬이  작곡을 했다고 했다. 그리하여 1950년대에는 <김용만 작곡집>음반이 시리즈로 발매되기도 했다.

▲ <김군 백군> 앨범재킷

작곡가 라음파의 예명인 ‘벽호’로 발표된 <명동부루스>가 그가 처음 작곡한 노래다.
자신의 이름으로는 <후라이 맘보>(손로원 작사)가 첫 작품.
이어 자신과 호형호제하며 콤비를 이뤘던 백야성의 노래들 -<잘있거라 부산항>, <못난 내청춘>, <항구의 영번지>, <마도로스 도돔바>, <김군 백군>(1963,듀엣곡), <왈순아지매>, <비나리는 남포동> 등의 노래들이 그가 손수 작곡한 노래들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제까지 그의 노래들은 SP음반 120곡, LP음반 150곡, 직접 작사·작곡한 노래가 80곡, 해서 대략 총 350곡 정도 된다고 했다. 요즘 잘 나가고 있는 후배 김용임, 이명주의 첫 취입곡을 그가 만들어 줬고, 강병철과 삼태기의 <행운을 드립니다>도 그가 작사·작곡한 신바람 나는 노래다.

뿐이랴. 스릴러영화 <월하의 공동묘지> 음악감독을 맡기도 해 다방면에서 그의 재능을 한껏 세상에 내보였다. 장르는 전통트로트에서 신민요, 만요에 이르기까지 독보적이었다.
그는 팝스타일 가수들이 한참 득세하던 1966년 한국연예인협회가 주관하는 제1회 전국음악대회에서 최희준·위키 리·박형준·유주용과 함께 만요가수로는 유일하게 10대 가수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1953년 <남원의 애수>로 데뷔해 정점을 찍은 뒤, 12년 만인 1965년 KBS 드라마 주제가 <회전의자>로 다시금 스타로서 황금기를 누리게 된다.

 

               <회전의자>

1. 빙글빙글 도는 의자 회전의자에
    임자가 따로 있나 앉으면 주인인데
    사람없이 비워둔 의자는 없더라
    사랑도 젊음도 마음까지도
    가는 길이 험하다고 밟아버렸다
    아~억울하면 출세하라 출세를 하라

2. 돌아가는 의자에 회전의자에
    과장이 따로 있나 앉으면 과장인데
    올 때마다 앉을 자린 비어 있더라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보자고
    밟아버린 젊음을 즐겨보자고
    아~억울해서 출세했다 출세를 했다

                           (신봉승 작사/ 하기송 작곡)

 

꿈과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도시 소시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유쾌 통쾌하게 되찾아준 노래다. 이 노래가 히트하면서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이 한동안 유행하기도 했다.
‘얼굴로 몸으로’ 노래하는 그의 노래에 녹아있는 소탈함과, 가식없는 서민적 감성은, 그의 품성 됨됨이와 많이 닮아있다.

그의 손길이 닿아 있는 노래들은, 날 선 칼 같은 깨어있는 자기수련과 끊임없는 공부가 뒷받침 돼 있다.
“내가 듣기 좋아야 남도 듣기 좋다”…그가 평소에 견지해온 노래철학이다.

그는 구십이 낼 모레인데도 한치의 흐트러짐 없는 짱짱한 현역이다. 무대를 떠나본 적도, 잊어본 적도 없다.
문득 더글라스 맥아더의 말이 떠오른다.
-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 저고리 씨스터스로 활동할 무렵 도쿄에서의 박향림(오른쪽은 이난영)

본명이 박억별인 박향림은, 흡사 연극대사를 읊조리듯, 뮤지컬을 연기하듯 낭랑한 목소리와 콧소리로 수준급 브라스밴드의 경쾌한 반주에 맞춰 3절의 가사로 된 이 곡을 노래해 인기를 모았다.
당시 이 노래의 광고를 보면, “돌부처라도 무릎팍을 치고 돌아앉을 익살진진한 명랑가요!”라고 소개하고 있다. 박향림은 재능이 많았던 인기 만요가수로서의 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스물 여섯살의 나이에 요절했다.

만요의 수준은 다소 저속했으나, 일제 식민치하에서의 억압에 따른 역설적인 슬픔과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풍자와 비판의식이 깔려 있어 그 나름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강홍식의 <유쾌한 시골영감>(1936)을 리메이크 한 서영춘의 <서울구경>, <영감타령>을 편곡·개사한 <잘했군 잘했어>, 그리고 신시내가 리메이크해 부른 <세상은 요지경>, 김용만의 <회전의자>, 한복남의 <빈대떡 신사>라는 노래들이 만요의 맥을 이어 온 노래들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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