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옛날의 트로트- 노래의 고향을 찾아서

<41> 김영춘 <홍도야 우지마라>

▲ 경기도 시흥시 방산동 작사가 이서구 묘역에 있는 <홍도야 우지마라> 노래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신파극을 꼽으라면, 대부분 <이수일과 심순애>를 첫 손에 꼽는다. 이는 일본의 소설이자 연극인 <곤지키야사>를 1913년 번안한 조중환의 <장한몽(長恨夢)>으로, 수도 없이 연극, 영화, 소설로 만들어졌다.

▲ 김영춘의 고향인 경남 김해시에 있는 <홍도야 우지마라> 노래비

‘수일이가 학교를 마칠 때까지 / 어이하여 심순애야 못참았더냐/ 낭군의 부족함이 있는 연고냐 / 불연이면 금전이 탐이 나더냐 // 낭군의 부족함은 없지요만은 / 당신을 외국유학 보내려고 / 부모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서 / 김중배의 집으로 시집을 가요.’
(<장한몽가> 2, 3절 가사)

오로지 돈 때문에, 오라버니·애인의 학비 뒷바라지를 위해 기생이 되고, 몸을 팔아야 했다는 이야기 설정은 고달픈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서민들의 애환 그대로여서 대중들의 가슴을 치고 흔들어댔다.
김영춘(金英椿, 1918~2006)의 노래 <홍도야 우지마라>는 이 이야기를 곧 자신의 처지로 동일시 한 장안 기생들을 눈물바다에 빠뜨렸다. 이 노래가 삽입된 악극이 상연되던 극장은 연일 만원사례에 울음바다를 이뤘다.

 

                        <홍도야 우지마라>
(전주·전화벨 소리에 이어 “인력거요” 하는 소리가 들린다.…대사)
- 홍도는 기생이요 그의 애인 영철은 대학생. “사랑에는 국경이 없소. 사랑에는 귀천이 있을 수 없소!” 밤 늦은 인력거에 지친 몸을 싣고 오늘도 홍도는 웃음과 노래를 팔러 나간다.

 

▲ 김영춘의 <홍도야 우지마라> 밀리언셀러 앨범재킷

1. 사랑을 팔고 사는 꽃바람 속에
   너 혼자 지키려는 순정의 등불
    홍도야 울지마라 오빠가 있다
   아내의 나갈 길을 너는 지켜라

2. 구름에 싸인 달을 너는 보았지
   세상은 구름이요 홍도는 달빛
   하늘이 믿으시는 내사랑에는
   구름을 걷어주는 바람이 분다

                 [1939, 이고범(이서구)작사 / 김준영 작곡]

 

세련미 없이 무성영화시대의 변사처럼 또박또박 멜로디를 읽어가는 다소 촌스럽기까지 한, 볼륨감 없는 높은 톤의 음성이지만 목에서 내뿜은 숨을 입안에서 한번 공글리다 힘있게 뱉아내는 김영춘 특유의 바이브레이션 창법은, 자못 비감어려 듣는 이들을 한순간에 긴장시킨다. 거기에 비극·비련의 여주인공인 기생 홍도의 신파적 서사 스토리까지…

▲ 신영균·김지미 주연의 영화포스터

왜 이 노래가 저 아득한 시절에 <나그네 설움>, <타향살이>와 더불어 ‘밀리언셀러 음반판매’ 기록을 세웠는지 가늠케 해준다.
<홍도야 우지마라>는 본래 악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에 삽입된 노래다.

희곡작가 임선규(1912 ~1970, 월북 여배우 문예봉의 남편)의 희곡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전 4막5장)를 1936년 7월, 동양극장 전속인 청춘좌 극단이 한국 최초 연극전용 상설극장인 동양극장 무대에 올린 신파 비극이다.

이 악극이 상연되던 3년 내내 동양극장은 연일 관객들로 초만원을 이뤄 극장 유리창이 모조리 깨질만큼 인산인해, 인기폭발이었다. 뿐이랴, 동양극장은 이 악극을 보러 온 장안 기생들의 울음바다가 되고, 이 극을 보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한강에 투신자살하는 기생들도 여럿 생겨났다.
남일연이라는 콜럼비아레코드사 전속 여가수가 부른 이 악극의 본 주제가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역시 인기를 모았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1. 거리에 핀 꽃이라 푸대접 마오
   마음은 푸른 하늘 흰구름 같소
   짖궂은 비바람에 고달퍼 운다
   사랑에 속았다오 돈에 울었소

2. 사랑도 믿지 못할 쓰라린 세상
   무엇을 믿으리까 아득한 세상
   억울한 하소연도 설운 사정도
   가슴에 줏어담고 울고 살까요

     [1939, 이고범(이서구)작사/ 김준영 작곡/남일연 노래]

 

▲ 악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포스터

이 악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광복 이전 한국 연극사상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한 기록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1939년 이명우 감독에 의해 영화화 되기도 했었으나, 흥행에는 실패했다.

이 노래와 <홍도야 우지마라> 작사가인 이서구(1899~1982)는 드라마 <장희빈>과 <강화도령>을 집필한 극작가다.
작곡가 김준영(1907~1961)은 1930년대 콜럼비아레코드사 문예부장 출신으로 <홍도야 우지마라> 외에 <처녀총각>, <마의태자> 등의 노래를 남겼다.

<홍도야 우지마라>를 부른 가수 김영춘(본명 김종재)은 경남 김해 출신이다. 농고를 졸업하고 20세 때인 1938년 부산에서 양복 재단일을 배우던 중에 콜럼비아레코드사 주최 가요콩쿠르에 입상, <항구의 처녀설>이란 노래를 내놓으며 데뷔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939년에 그의 일생일대 히트곡이 된 <홍도야 우지마라>를 취입했다. 이외에 <청춘마차>, <버들잎 신세>, <사막의 환호>, <항구의 여자>, <바다의 풍운아>, <남국의 달밤>, <국경 특급> 등 많지 않은 노래를 남겼다.
그러나 <홍도야 우지마라> 음반이 밀리언셀러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말년까지 생활고에 시달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홍도야 우지마라>는 1950년대에는 <울고넘는 박달재>를 부른 박재홍이, 1960년대에는 <고향무정>을 부른 오기택이 다시 리바이벌해 불러 예전에 버금가는 인기를 얻기도 했다.
<홍도야 우지마라> 노래비는 모두 두 개다. 하나는 작사가 이서구 묘역(경기도 시흥시 방산동)에 그의 14주기 때인 1995년 세워졌으며, 다른 하나는 김영춘의 고향인 경남 김해시(활천로 238)에 세워져 있다.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 ‘저항가요’로 출발, 서민들의 젓가락 장단에 실려 고달픈 삶의 애환을 달래줬던 대표적인 ‘옛 뽕짝’. 그리고 신파극의 상징이 된 <홍도야 우지마라>의 주인공 홍도는, 지금도 한국인 누구나의 가슴 속에서 눈물 자아내는 ‘영원한 누이’로 살아 숨쉬고 있다.

 

▲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상연됐던 우리나라 최초 연극전용 상설극장-동양극장 옛모습.

1920년대 이후 우리나라에서 대중가요와 연극을 스토리로 엮어서 만든 극의 양식이다. 노래극이란 뜻으로 일명 가극(歌劇)이라고도 한다.
이 악극은 1920년대 말엽 소위 ‘타락한 신파극’이 파생시켰다. 발생요인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1920년대 극장시설이 부실했던 탓에 관객들의 지루함을 없애고, 흥행을 위해 만든 막간 쇼가 악극의 모태가 됐다. 막간에 펼쳤던 노래와 재담, 촌극이 악극으로 발전한 것이다.
둘째는, 음반 판매를 위한 홍보수단에서 비롯됐다. 당시 오케레코드사·빅타레코드사·콜럼비아레코드사 등의 대형 레코드사들이 소속 작곡가·가수들을 주축으로 악극단을 만들어 지방순회공연을 하면서 가수와 음반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 악극 <홍도야 울지마라> 포스터

셋째는, 일본 가극의 영향이다. 1930년대를 전후해서 일본에 가서 음반제작을 했기 때문에 그때의 견문이 악극 도입의 계기가 됐다.
악극단의 시초는, 1929년 권삼천이 조직한 삼천가극단과 무용가 배구자(이토 히로부미 양녀였던 배정자의 조카로 남편과 동양극장을 설립했다)가 일본에서 조직한 배구자악극단이다. 그후 1940년대에 빅타가극단, 반도악극단, 조선악극단, 콜럼비아악극단, 케이 피 케이 악극단 등 20여 개의 크고 작은 악극단들이 활발하게 활동을 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다 1950년 6.25 전쟁 이후, 구태를 벗지 못한데다가 영화·방송 등 대중매체의 급속한 발전에 밀려 만 40여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그리고 현대 쇼-시대가 새로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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