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자매네 반디농장 김영란의 전원일기⑬

"일을 즐겁게 하려면
나를 즐겁게 할 일을
병행해야만 한다.
일은 삶이고 취미는 삶을
풍요하게 해준다..."

청수리 곶자왈에 백서향이 만개해 숲이 그 향기로 가득하다고 지인이 함께 가보자고 해 마음이 들떠서 단숨에 허락했다. 다음날이 되자, 봄이 와서 아우성치며 올라오는 새싹 위의 묵은 검불을 걷어내는 일이며, 텃밭 만들어서 씨앗도 뿌려야 하고, 귤농장 주변 사방에 심어놓은 꽃들이 삭정이가 돼 산발을 하고 있고... 머릿속엔 할 일이 줄을 서서 떠오르고 있다.

할 일이 태산같이 많은데 꽃놀이 갈 때가 아니라며 마음 한 편에서 호통을 친다. 마음이 설왕설래 하다가 지인에게 못가겠다고 문자를 보냈다. 일중독증이 생겨서 놀아도 개운하지 않고, 머릿속이 일 생각으로 가득하니 딱한 인생이라며 혀를 차고 있는데, 지인이 다시 전화를 했다.
“일은 내일 해도 되지만 백서향 꽃은 지면 내년에나 필 텐데...” 하며 은근히 팔소매를 잡아 당겨주니 마음이 다시 부풀어 올랐다.
“그렇지, 지금 아니면 볼 수 없는 풍경과 추억이지~”

만사를 제치고 달려간 청수리 곶자왈에는 백서향이 군락을 이뤄 숲 전체가 은은한 꽃향기로 일렁거렸다. 산책하기 적당한 거리였고, 고즈넉한 원시림에서 방긋방긋 웃고 있는 백서향을 보니, 일 핑계로 오지 않으려던 마음을 꾸짖으며 이끌어 준 지인에게 크게 고마워했다.
“이 아름다운 풍경과 향기와 즐거움을 놓칠 뻔 했구나~”
머리, 몸, 마음 가득히 향기를 채우고 나니 포만감으로 충만해졌다.

일개미처럼 살았어도 늘 곁에 꽃을 심어두고, 마음을 달랜 덕분에 17년 농부생활이 돌아보면 꽃길 같다. 꽃은 나를 구원하고 내게 에너지를 채워줬다. 멀리가지 못하고 붙박이처럼 살았어도 내 뜰에 꽃을 심어두고 위로 받고, 에너지를 자가제조하며 살았다.
한나절 소풍 가는 것조차 주저해야 할 만큼 일이 지천이지만 청수리 곶자왈 백서향 정원을 보고나니 또다시 즐거운 일개미로 봄날을 보낼 것 같다.

노동의 대가인지 노화현상인지 무릎연골이 닳아서 걸을 때마다 통증이 오는지라, 오름에 복수초가 봄을 노래하고 있다고 유혹해도 사양했다. 매일 한라산을 올려다보면서 올라갈 엄두는 못 내고, 아이들 다 키우면 떠나보려던 산티아고행 꿈은 일장춘몽이 됐지만 나를 다시 설레게 할 대상을 새로이 만났다. 그림이다.

지지난해 머리에 대상포진이 와서 혼비백산했다. 자칫 한 발만 내디디면 온 몸이 마비가 올것 같은 경험을 하면서 삶을 다시 돌아봤다. 궤도를 이탈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살았는데,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가 되자 나는 자기연민에 빠졌다. 긍정마인드로 바로 회귀가 안 돼서 한참을 자조의 늪에서 헤맸다. 아플 만큼 아프고 나야 정화가 된다.

다시 찾아온 고요한 생명 에너지. 꿈이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살아~ 남은 인생은 그림을 그리면서 살기로 했다. 일을 즐겁게 하려면 나를 즐겁게 할 일을 병행해야만 한다. 일은 삶이고, 취미는 삶을 풍요하게 해준다. 일주일에 4일 일하고, 3일은 나를 위해 보내기로 계획을 세워본다. 퇴직은 못해도 이 정도는 해줘야 나에게 보답하지 않겠는가?
드디어 내 인생의 화양연화(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는 이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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