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자수필-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아직 서툰 미동뿐이나
희망의 소리 들리는 듯
귀를 후비게 되고
온 몸이 근질근질하다"

새해가 엊그제 같았는데 설이 지나고 벌써 2월 달력도 넘어갔다. 만물이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이 며칠 앞이지만 아직 찬바람에 이가 맞지 않는 문짝이 쿵덕쿵덕 소리를 내고 덜컹덜컹 현관 철문을 흔든다. 밖에서 동네 개 짖는 소리, 누군가 돌아오는 발자국 소리에 소스라쳐 문을 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앞산은 희뿌옇게 안개구름에 내려앉았다. 봄은 ‘아직’ 멀었다.

우리 동네는 집집이 다 산을 하나씩 끼고 있다. 우리도 산중턱에 살고 있어 집 뒤꼍을 나서면 산 밑 다랭이밭들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 발치에 밭과 산의 경계선을 허물고 길이 나 있어 굳이 산을 오르지 않아도 산허리를 따라 걷노라면 멀리 목도다리를 지나 굽이치는 산줄기 아래로 구불구불 흐르는 강줄기가 지도처럼 펼쳐진다. 폐부를 할퀴듯 쏘아오는 찬공기를 들이마시는 기분은 아주 상쾌하다. 산길 입구에만 서도 공기가 달다. 

최근 들어 부정맥도 생기고 허리도 좋지 않아 겨우내 집밖 출입을 하지 않다가 모처럼 나선 산책길이라 그동안 모두가 궁금하고 반갑다. 고즈넉하게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없는 숲길을 나무 지팡이 하나로 느리게 걷는다.
갑자기 ‘후두둑’ 고라니 한 마리가 덤불 속에서 뛰쳐나와 엉덩이를 내보이며 산등성이로 내쳐 달린다. 놀란 가슴 쓸어내리며 양지쪽으로 걷다보니 언땅이 녹아 질퍽거리고 미끄러워 중심잡기가 만만찮다. 오늘은 여기까지 마침표를 찍고 돌아온다. 해가 구름 속으로 들어가고 다시 술렁술렁 바람이 일고 흔들리는 것은 모두 소리를 낸다. 목도리를 단단히 여미고 내려가려는데, 질척거리는 흙이 신발 바닥에 자꾸 들러붙는다.

빨리 내려가고 싶은 맘에 무거운 발걸음을 서둘렀다. 생각만으로 풍경속의 우아한 산책을 그린 것은 큰 오산이었다. 춥다고 주머니에 손을 넣을 수도 없고, 중심을 잘 잡아 마른 풀에만 발을 내딛는다. 마스크 위로 안경에 서리는 입김에 흐려지는 시야를 닦아내면서 산책하며 명상하려는 계획은 온 데 간 데 사라지고 살려는 의지만 가득하다. 맘이 조급해지니 어떤 풍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숨을 헐떡이며 집 뒤 다랭이밭까지 와서 비로소 바위 위에 걸터앉아 아픈 허리를 내려놓는다.

밭고랑에 빨간 냉이도 지천이었는데, 나도점나물, 벌금자리, 씀바귀, 지칭개, 납작 엎드려 겨울을 버틴 어린 풀들도 있었는데. 보이는 3월초 들녘은 황량해도 다가가면 다르다. 풍경은 존재하는 게 아니라 발견되는 거라던가. 들여다보고 또 귀 기울이고 이름을 불러주면 겨우내 땅속에서 살아 있는 것들의 생명의 속삭임이 들려온다. 나는 오늘 너무 조급해서 놓친 것들에게 미안하고 안타깝다. 붉은 저녁노을도 내 부끄러움을 아는지 산을 다 태워버릴 듯 능선 너머로 스러진다.

돌아오는 길에 느낀다. 아직은 서투른 미동뿐이나 희망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자꾸 귀를 후비게 되고 살갗이 터질 듯 온 몸이 근질근질하다. 뭔가 우리 곁을 서성이는 예감. 아무튼 아직 봄은 이르다. 그래도 산수유가 피는지 문득 저편 마당 한 쪽이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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