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자수필-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지금과 다른 삶’을
살아가기에 세상은
이미 최적화돼 있다.

‘인간은 천 개의 페르소나를 갖고 있고 상황에 맞게 꺼내 쓴다.
-칼 구스타프 융-

코로나와 원치 않는 동거가 일 년을 넘기며 이제 거의 생활의 일부가 됐다. 이 동거인은 내 일상에 포기와 멈춤을 강요하고, 삶의 반경을 좀먹어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미니멀 라이프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다 생각해보면 작금의 힘듦보다 이 터널의 끝을 알지 못함이 더더욱 암울하다.

지난주에 그래도 다니던 교회 전체 인원에 10%까지 대면출석이 허용돼 탈출하듯 일찍 서울로 출발해 예배를 드리고 손주가 있는 작은 딸네로 갔다. 그동안 못 본 사이에 주먹 하나 만큼 더 자란 손주녀석은 오랜만이어선지, 제 엄마 곁에서 몸을 배배 꼬며 배시시 웃는다. 때 마침 큰딸도 와서 나는 준비해온 것으로 점심상을 차리고 손주녀석을 불렀다.

“도후야 밥 먹자, 도후 좋아하는 갈비 구웠는데~” 식구가 식탁에 모두 둘러앉았지만 손주녀석만 딴청이다. 만들어 놓은 레고블럭이 삐뚤어졌다는 둥, 당장 책을 봐야한다는 둥, 갑자기 스케치북을 찾아 글씨를 쓰겠다는 둥. 식탁에 앉히고도 문제다. 제 좋아하는 곤충책을 펴들고 밥수저에 고기 한 점 올려졌는데도 숟가락을 안 들고 날 보며 입만 쩍 벌린다. 밥을 먹여달라는 신호다.

제 스스로 먹어야한다고 애미는 한 말 하지만 나는 못 들은 척 밥숟갈을 손주 입에 넣어준다. 할미만 오면 저 녀석이 저런다 한다. 그래도 반찬이 식는 것도 맘에 걸리고 늑장부리다 제 밥그릇의 밥을 남기는 것도 걸려서 나는 부지런히 손주 입에 밥을 넣는다.

잠깐 손주녀석이 할아버지와 안방에서 TV를 보는데, 애미가 내게 와서 나직이 말하길 “도후, 이중생활 하는 거야.며칠 전 어린이집에 상담을 갔다가 집에서 식사습관이 잘 안 잡혔는데 여기서는 어떤지 선생님께 여쭈었더니, 글쎄 식판에 주는 대로 밥이고 김치고 깍두기고 가리지 않고 한 톨도 남김없이 싹 다 먹어서 친구들의 모범이라고 하더라고. 집에선 김치가 맵다고 절대 안 먹거든. 야채도 안 먹고. 밥도 떠먹일 때도 많고 그렇거든.” 

큰딸이 끼어들면서 “어허! 그건 ‘멀티 페르소나’지. 엄마가 그걸 몰라서야...” 큰 딸의 설명으론 도후는 때와 장소에 따라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 자신의 캐릭터를 자유자재로 바꾸고 있다는 것. 사회생활을 하는 어린이집에서는 동생과 친구들에게 모범을 보여주는 형의 페르소나를, 집에 있을 때에는 엄마 아빠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아기의 페르소나를 보여준 것이라고.

페르소나는 고대 그리스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오늘날 심리학에서는 ‘타인에게 미치는 외적 성격(캐릭터)’을 말한다. 복잡해지고 개인화한 현대사회에선 과거처럼 한 가지 모습으로 평생 살아가는 일이 어려워졌는지도 모른다. 이젠 앞뒤가 다른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당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 상황에 맞는 능력에 맞는 여러 개의 가면을 필요에 따라 바꿔 쓰는 것은 이미 트렌드가 됐다는 이야기다.

TV만 켜도 여러 개의 나를 갖고 상황에 맞게 ‘나’를 꺼내 쓰고 있다. ‘지금과 다른 삶’, ‘한 번쯤 살아보고 싶었던 삶’을 살아가기에 세상은 이미 최적화돼 있다. ‘나다움’의 추구가 좀 더 쉬워진 것이다. 요즘 같은 코로나 시대에 하나의 페르소나에 갇혀 숨 막히는 세상을 버티는 것보다는 여러 개의 페르소나를 갖고 소확행을 꿈꿔 봄이 어떨지~ 
모처럼 멀티플레이를 한 손주녀석과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오늘을 알아듣고 내일의 손주와 소통하는 단어 하나를, 어쩌면 코로나를 떨칠 수 있는 자신의 페르소나를 오래도록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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