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옛날의 트로트 - 노래이 고향을 찾아서

▲ ‘소양강 처녀상’ 제막식 때 자리를 함께 한 작사가 반야월 선생과 김태희.(왼쪽 맨뒤는 최문순 강원도지사)

<38> 김태희 <소양강 처녀>

1960~1970년대 국토개발·산업화 시대를 지나면서 트로트에는 일제강점기의 전통트로트에서 잘 보이지 않던 시골 이미지가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제목에서부터 그런 냄새를 물씬물씬 풍겼다. <충청도 아줌마>, <흑산도 아가씨>, <서귀포 아가씨>, <삼천포 아가씨>, <하동포구 아가씨>… 그리고 <소양강 처녀>.

그렇게 당대 유행에서 좀 뒤떨어진 촌스러운 이미지를 가진 노래들이었지만, 전국적으로 널리 퍼지면서 서민의 노래가 됐다.
특히 ‘새마을운동’이라는 국가재건 프로젝트와 라디오·텔레비전의 보급 확대에 따른 드라마·영화·대중가요 보급의 활성화, 주간지·여성월간지 등 상업적 오락매체의 등장은 대중음악의 전국 확산에 한 몫 단단히 했다.
생뚱같은 건전가요 보급, 퇴폐풍조 일소 등의 슬로건도 있었다.

 

         <소양강 처녀>
1. 해저문 소양강에 황혼이 지면
   외로운 갈대밭에 슬피우는 두견새야
   열여덟 딸기같은 어린 내 순정
   너마저 몰라주면 나는 나는 어쩌나
   아~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 처녀

2. 동백꽃 피고지는 계절이 오면
   돌아와 주신다고 맹세하고 떠나셨죠
   이렇게 기다리다 멍든 가슴에
   떠나고 안오시면 나는 나는 어쩌나
   아~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 처녀

3. 달 뜨는 소양강에 조각배 띄워
   사랑의 소야곡을 불러주던 님이시여
   풋가슴 언저리에 아롱진 눈물
   얼룩져 번져나면 나는나는 어쩌나
   아~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 처녀

                        (1970, 반야월 작사/ 이호 작곡)

 

이 노래가 세상에 나오던 해인 1970년, 제대로 얼굴조차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았던 무명의 신인가수 김태희(1951~ , 본명 박영옥)는 하루에 100여통의 팬레터를 받았다고 한다.
음반은 단숨에 10만 장의 판매기록을 세웠다. 그해 신인가수상도 받았다. 이때 노래판에서는 남진의 <님과 함께>가 일대 돌풍을 일으킬 때였다.

▲ <소양강 처녀>노래비

춘천의 랜드마크…‘소양강 처녀상’
이 노래의 빅히트와 롱런 행진으로 정말로 신이 난 건, 강원도청을 춘천시에 두고 있던 최문순 강원도지사였다. 그는 2004년부터 소양강 일대를 독일의 로렐라이 언덕처럼 관광명소로 발전시키고자 프로젝트를 하나하나 발굴해 진행시키고 있던 참이었다.

그리하여 소양강 지류인 춘천시 근화동에 총사업비 5억5천만 원을 들여 ‘소양강 처녀상’(조각가 남상연 작)을 세웠다. 조각상으로서는 그 높이가 국내에서 가장 높다. 그리고 그 앞 소양2교 부근에 <소양강 처녀>노래비(2005)도 세워, 춘천에 오는 이면 누구나가 한 번쯤 찾아보는 소양강의 랜드마크가 됐다.

김태희는 우리 대중음악계에서 첫손에 꼽는 유명작곡가 박시춘(1913~ 1996)의 친조카로 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고 한다. 말하자면, 하찮은 ‘노래 한 곡에 목숨 걸 만큼’ 사정이 절박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녀의 무명가수시절 또한 표나는 어려움 없이 보낼 수 있었던 정황 또한 그런 이유에서다.

▲ 나훈아와 함께 찍은 데뷔 때의 컴필레이션 음반재킷

아무튼, 이 노래는 그녀가 19살 때(1970) 나훈아 등과 함께 ‘컴필레이션(compilation, 편집)’ 음반에 수록된 8곡 중 한 곡이었는데, 시쳇말로 ‘대박’을 터뜨렸던 것이다.

그녀는 노래 취입 10년 뒤인 1981년 결혼과 함께 모든 노래활동을 접었다.
그리고 20년 넘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크게 아쉬울 것 없는 평범한 가정주부로 생활했다.
그러는 사이 그녀의 노래 <소양강 처녀>는 ‘저 혼자’, ‘얼굴없는 가수’의 노래로 전국의 노래방을 접수했다. 일단 따라부르기 쉽게 몸에 착착 감기는 리듬과 애잔한 연민 섞인 호소력 있는 창법이 듣는 이들 가슴에 잔잔한 파문이 일게 했다. 곧 ‘나의 소양강 처녀’였던 것이다.

<소양강 처녀>는 1992년 한국갤럽이 조사한 ‘성인 남녀 100명 대상 노래방 인기순위 집계’에서 1위를 차지했다. 또한 KBS <가요무대>방송 35년 결산 ‘애창곡 방송순위 100선’에서 당당히 11위에 올랐다. 이미자의 대표히트곡 <동백아가씨>보다 다섯 순위 위요,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다음 순위였다.
그녀는 흡사 필연처럼 이혼 후 20여 년 만에 다시 노래판으로 돌아왔다. 이때는 노래가 그녀를 불렀다.

숱한 화제 속에 노래인기 식지 않아
<소양강 처녀>는 노래의 식지않는 인기만큼이나 노래에 얽힌 에피소드 또한 분분히 세간의 화제가 됐었다. 노래가 한참 뜨자 작사가 반야월(1917~2012)이 생전에 노랫말의 주인공이라는 실존 ‘소양강 처녀’ 이야기를 세상에 흘렸던 것이다.

반야월 자신의 서울 을지로 사무실에서 여급으로 일하던 가수지망생 윤기순(1953년생)의 고향집이 있는 춘천으로 작사·작곡가 10여 명이 초대돼 소양강 언저리에서 천렵을 하게 됐고, 이때의 정감을 노랫말로 지어 1969년 봄 오아시스레코드사에 들러 “신곡 노랫말로 쓰라!”고 던졌다. 이를 당시 레코드사 문예부 상담역으로 있던 이호가 나서서 작곡했다는 얘기가 그 하나다. 일설에는 노래의 타이틀도 애초에는 ‘춘천 처녀’였는데, 어감이 ‘소양강 처녀’가 나아 바꿨다고 전한다. 이 윤기순이란 아가씨 얘기는 2000년에 KBS-TV <이것이 인생이다>를 통해 방영되기도 했다.

또다른 노랫말 주인공으로 거론되는 이는 박경희씨. 1950년생으로 1967년 춘천여고 3학년생이었던 박 씨는 가족들이 춘천 소양1교 부근에서 숙박업(여관)과 뱃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때 이 여관에서 작사가 반야월이 한 달 가량 묵어지내며 시심을 다독인 적이 있었다는  것. 그러던 그가 서울로 떠나며 박양에게, “네 사연 노랫말로 썼으니 나중에 레코드 만들어지면 춘천에 내려와 전해주마” 하고 떠났던 것. 이것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세상에 <소양강 처녀> 주인공 실화로 흘러다녔던 것이다.

▲ ‘소양강 처녀’ 노랫말 주인공들(최문순 강원도지사의 초대를 받았다)

음악계에서는 반야월이 생전에 이름까지 거명했고, 야간업소 무명가수생활을 하기도 했던 윤기순을 유력한 주인공으로 꼽고 있다.
이토록 말도 많고 사연도 구구절절 많았던 <소양강 처녀>는, 1992년 한서경이 젊은이들 취향에 맞게 랩트로트로 리메이크 해서 부를 때 3절 가사가 추가되기도 했다. 이 생기 넘치는 새 리듬으로 축구장이며 야구장을 뜨겁게 달구는 응원가로 하늘 높이 애드벌룬처럼 떠오르기도 한다.
그렇게 ‘소양강 처녀’는 반세기가 넘는 세월이지만, 지금도 호반의 도시 춘천의 소양강 노을에 젖어 “열여덟 딸기같은 어린 내 순정”을 노래하고 있다.

 

▲ 가라오케관 체인점

우리나라 노래방 역사의 시작은 1990년대 초, 일본의 ‘가라오케’가 들어오면서부터다. 일본의 노래방이라 할 수 있는 가라오케는 우리나라에 들어와 ‘노래연습장’ 혹은 ‘단란주점’이라는 대중문화공간으로 빠르게 자리잡았다.

‘가라오케’는 ‘비어 있다’는 뜻의 ‘가라(空)’와 ‘오케스트라’의 ‘오케’를 따서 만든 합성어다. 노래방이라는 공간의 의미보다는 노래가 들어있지 않은 ‘반주기계’의 의미가 더 강하다.
그리고 일본에서의 가라오케는 개인이 운영하는 노래방보다 주로 체인점 체재로 운영된다는 것이 우리와 크게 다른 점이다.

즉, 회원카드제를 운영하는 가라오케관, 보다 대중적인 노래광장이란 의미의 우타 히로바, 커피숍 분위기의 빅 에코 체인점들이다.
요금은 우리처럼 ‘방(房) 당’이 아니라 ‘사람 당’이니, 당연히 비싸다고 할 수 있다. 보통은 오전 10시~다음날 새벽 5~6시까지 운영되는데, 의당 사람이 몰리는 주말엔 더 비싸다. 입장요금 외에 음료수 한 잔은 꼭 시켜야 하고, 술과 음식도 판매한다.(피크타임을 피해 보통 오전 10시 이후 낮시간에는 8시간에 우리 돈 2만 원 정도면 충분히 즐길 수 있다.)

▲ 노래방 내부

이 가라오케는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부산지역에 처음 들어왔다. 이때 들어와 처음으로 개설된 우리나라 최초의 노래방은, 부산 동아대 앞에 있었던 ‘로얄전자음악실’이었다. 상호에서 보듯이 시간제로 운영되는 노래방이 아닌 ‘코인 노래방’ 형식이었다.

전국에서 최초로 상업적으로 등록한, 말하자면 노래방 등록 제1호점은 1991년 부산 광안리해수욕장에 있던 ‘하와이안 비치노래방’이었다. 이후 1년 만에 전국에 노래방 1만2000곳이 문을 열었다. 노래방은 하나의 신천지이자 전국민의 ‘스트레스 해방구’였다.

이때 광안리 해수욕장의 ‘하와이안 비치 노래방’에서 불리던 인기곡 순위에서 줄곧 1위를 차지했던 노래가 ‘얼굴 없는 가수’ 김태희의 <소양강 처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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