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 - 서봉남 화백

개구쟁이 어린이의 천진난만한 모습과 거룩한 기독교 성화(聖畵)를 그려 명망을 얻고 있는 서봉남 화백을 만났다.
서 화백은 불모의 한국 기독미술사 연구에 힘쓰며 그에 관련된 책도 저술하는 등 기독미술사가로도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아마추어 미술학도를 양성하기 위해 문화센터 내에 ‘성인미술강좌’를 개설하고, 불우한 후배 화가 지원에도 큰 역할을 해오고 있다 서 화백의 50년 화가 인생을 들어봤다.

 

어릴 적 땅바닥 도화지 삼아 그림 몰두
33세에 화가 입문해 평생 성화 그려
14년간 기독미술사 훑어 책 펴내
후배화가 양성하려 ‘성인미술강좌’ 개설

그림 소질 살려 33세에 화가 입문
“저는 어린 시절 흙바닥에 막대기로 그림을 그렸고, 또 남의 집 벽에 차돌이나 분필로도 그림을 그렸어요. 겨울엔 찬 유리창에 입김을 불어 순간적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죠. 호랑이 같이 무섭던 동네 할아버지와 소녀 얼굴을 크레파스로 그려 방 벽에 붙이고 혼자 감격하곤 했어요.
1968년 군 제대 후에도 여전히 그림 그리기에 빠져있던 저는 한국을 대표하는 색채가 뭘까 생각했어요. 사계절 기후가 만들어내는 암갈색, 흙이 만들어내는 황토색, 그리고 우리 겨레가 백의민족이란 점에 착안해 제 작품의 주조색을 암갈색, 황토색, 흰색으로 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림의 주제는 어릴 적 따사롭게 느꼈던 가족 사랑을 떠올리며 가족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서 화백은 모태신앙 크리스천이었는데, 어느 날 새벽기도 중에 ‘기독미술’이라는 말이 우연찮게 튀어나왔단다. 그래서 서 화백은 자신의 미술적 재능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 믿고 6년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성화를 그리기로 했다. 그 때가 1977년, 그의 나이 서른 세 살이었다.

14년간 국내외 기독미술사 추적
막상 기독미술 공부를 하려 했지만 처음부터 장벽에 부딪쳤다. 전국의 미술대학과 신학대학에 불교미술과는 있어도 기독미술과는 단 한 곳도 없었던 것이다. 그는 독학을 하기로 하고 서점에 들러 기독미술에 관련된 책을 찾았지만 그 분야의 책도 전혀 없었다. 도서관이나 청계천의 헌책방도 샅샅이 뒤졌지만 허사였다.

“1977년부터 기독미술 자료를 찾으려 사진기를 둘러메고 전국의 교회를 찾아다니며 자료를 구하고 사진을 찍었어요. 업무차 방문했던 일본, 인도, 터키,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등지에서도 자료를 수집한지 14년 만에 ‘기독교미술사’(집문당·1994년)라는 책을 한국 최초로 발간했죠. 지금까지 23개국으로 전시 겸 스케치여행을 다녔는데, 그곳의 기독미술 자료들이 마치 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찾게 돼 신기하고 기뻤습니다.”

서 화백은 종교화인 성화를 그리는 작업에 대해 설명을 이어갔다.
“저는 종교화를 그리면서 가능한 남의 작품을 보지 않고 제 작품세계를 개척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인물의 일대기와 흔적을 확인하고 역사책을 참고하며 4천년 전의 환경들을 더듬어 그림을 그렸습니다. 하지만 내 생애에 성서 속 인물들을 다 그릴 수 있을지 걱정도 했죠. 마지막 신약의 사도들의 행적을 그리고 나니 어느덧 제 나이 예순 여덟이 됐습니다. 35년이나 걸린 것이죠.”

후배화가 양성 위해 미술강좌 열어
가난으로 인해 늦은 나이인 서른셋에 전업화가의 길을 밟게 된 서 화백은 자신처럼 미술공부를 하고 싶어도 사정상 그 길을 걷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애틋한 연민으로 미술강좌를 개설했다. 서 화백은 1980년 초 기독교방송국의 영어강좌를 진행하는 문화센터 원장인 목사가 지인이었기에 그에게 ‘성인미술강좌’ 개설을 제안했다. 그는 서 화백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강좌가 개설됐다.
“각 반마다 20명씩을 모집한다고 광고를 냈는데, 놀랍게도 200여 명의 수강생이 전국에서 몰려들었어요. 성인미술 강좌 이후 신문사와 전국의 백화점 내 문화센터, 시군구와 동사무소에까지 미술강좌가 개설되는 붐이 일어났어요.”

치과원장 지원으로 11년간 미술관장
어느 날, 서 화백은 이 치료차 동네 치과에 갔다. 치료를 하던 의사가 서 화백에게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화가입니다.”라고 했다. 원장은 자신도 화가가 꿈이었는데 부모의 권유로 의사가 됐다면서 이 얘기 저 얘기를 주고받다가 서로 가까워지면서 점심친구가 됐다.
한 때는 점심식사 후 치과원장이 병원신축 공사 구경을 가자고 했다. 새로 짓는 병원은 6층 건물로 내부를 꾸미고 있었는데, 1층은 은행, 2층엔 카페가 들어오고 3층부터 6층까지 병원이 들어설 것이라고 했다.

치과원장은 서 화백에게 꿈이 뭐냐고 물었고, 서 화백은 미술관을 만들어 어려운 화가들의 작품전시회를 열어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화가 중 90%가 40대까지 전시회를 갖지 못하고 평생 무명화가로 지낸다고 부연했다.
이튿날 치과원장으로부터 점심을 먹자고 전화가 왔다. 만나자마자 원장은 어제 한숨도 못 잤다고 말했다. 어디 아팠냐고 묻자 원장은 “미술관 때문에...”라고 대답했다.

“치과원장님이 제가 얘기한 꿈을 도와주겠다며 1층 은행과 2층 카페 임대계약을 해약했고, 저를 관장으로 한 무료미술관을 개관하겠다고 하더군요. 극구 사양했지만 원장님은 끝내 미술관을 개관하고 저를 미술관장에 앉혔습니다.”
서 화백은 11년간 미술관장을 맡아 많은 화가들이 무료전시를 도왔다. 작품 한 점도 팔리지 않아 빈손으로 전시를 마치는 화가들의 모습이 안쓰러워 작품을 사주기도 했다.

그는 서랍 속에 모아둔 50만 원을 내주면서 “4호짜리 작품을 내가 살 테니 아내에겐 50만 원에 팔렸다고 말하세요.”라며 돈을 건넸다. 이런 식으로 갖게 된 후배작가의 작품 100여 점을 소장하게 됐다며 서 화백은 웃었다. 후배작가들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착잡하고 잔잔한 감동도 밀려온다고 그는 말한다.

IMF사태로 자신을 후원한 치과병원장이 불황으로 힘들어하자 서 화백은 미술관 폐관을 제의하고 관장직에서 자진해서 물러났다.
“하나님께서 치과원장을 만나게 해주시고 미술관을 11년간 운영할 수 있게 해주셔서 지금도 감사합니다. 원장님의 배려를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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