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옛날의 트로트- 노래의 고향을 찾아서

<35> 은방울자매

▲ <마포종점>노래비와 노래비 공원(1991. 서울 마포구 도화동 복사꽃 어린이공원 소재)

은방울자매의 큰방울-박애경과 작은방울-김향미가 듀엣으로 함께 노래하기 전인 1950년대 말~1960년대 초는, 트로트가 산업화·도시화라는 새로운 시대 분위기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노래 주제는 여전히 한결같이 사랑과 이별, 그리움과 서러움, 삶의 비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 <삼천포 아가씨>노래비.(2005. 경남 사천시 삼천포항 공원 소재)

그러다, 이미자의 <동백아가씨>의 대히트를 계기로 다시 부활한다. 그리고 그 뒤를 조미미·배호가 이어가면서 활력 재충전이 되고, 나훈아·남진으로 이어진다. 이때, 일제강점기 트로트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던 ‘촌스러운 시골 이미지’를 물씬 풍기며, 전국적인 ‘서민의 노래’로 폭넓게 자리잡게 된다.

“똑같은 가느다란 청음(淸音)의 목소리로 제창하는 맑고 가벼운 트로트 양식”으로 평가, 정의된 은방울자매의 히트곡들-<쌍고동 우는 항구>, <삼천포 아가씨>, <하동포구 아가씨>, <마포종점>, <무정한 그 사람>은 바로 전국적인 서민의 노래- 그 하모니의 절창들이다.

 

▲ <마포종점> 앨범재킷

             <마포 종점>

1. 밤 깊은 마포종점 갈 곳 없는 밤전차
   비에 젖어 너도 섰고 갈 곳 없는 나도 섰다
   강 건너 영등포에 불빛만 아련한데
   돌아오지 않는 사람 기다린들 무엇하나
   첫 사랑 떠나간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2. 저 멀리 당인리에 발전소도 잠든 밤
   하나 둘씩 불을 끄고 깊어가는 마포종점
   여의도 비행장엔 불빛만 쓸쓸한데
   돌아오지 않는 사람 생각한들 무엇하나
   궂은비 내리는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1968, 정두수 작사/ 박춘석 작곡)

 

당시 마포종점 부근 동네(도화동)에 살고 있던 작사가 정두수는 서강 초입의 유명 단골 설렁탕집-마포옥의 주인장으로부터 두 연인의 서글픈 사연을 듣는다. 미국유학 간 사랑하는 남편이 뇌졸중으로 사망한 줄도 모르고 실성한 사람처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마포종점에 나가 마지막 전차를 기다리던 여인의 슬픈 사랑…

정두수는 작곡가 박춘석과 마포옥에서 소주 한 잔을 나누다가 ‘바바바 바바바바~(밤깊은 마포종점~)’ 영감이 떠올라 그날 밤 이 노래의 가사를 지었노라고 생전에 회고했다.
은방울자매의 지구레코드사 전속기념으로 취입 발매한 이 노래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실연의 슬픔을 가슴에 보듬어 안고 있던 수많은 젊은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전설같은 <동백아가씨>(이미자)의 히트에 버금가는 인기와, 아울러 그와 맞먹는 음반판매고를 기록했다.

이때의 에피소드 하나. 큰방울 박애경이 이 노래를 취입할 당시 만삭의 몸이었는데, 이미자(동백아가씨)·현미(떠날 때는 말없이)가 그랬던 것처럼 “만삭에 녹음한 노래는 히트한다!”는 속설을 입증(?)시키기도 했다.

원년멤버 이민·사망으로 새 멤버로 활동중…
은방울자매의 원년멤버인 큰방울 박애경(1937~2005)은 작은방울 김향미(1997~미국 이민)와 같이 경남 밀양 출생으로 본명은 박세말이다. 어려서 부산으로 이사해 부산여상 3학년 재학 때 국제신문 콩쿠르에서 2등으로 입상했는데, 이때 심사위원이었던 이재호가 발탁, 1956년 <한많은 아리랑>으로 솔로 데뷔했다. 은방울자매 듀엣결성 전까지 모두 30여 곡의 솔로 노래를 남겼다.

작은방울 김향미(1938~ , 본명 김영희)는 경남 진영 한일고를 졸업했으며, 부산을 오가며 큰방울 박애경과 만나 노래연습을 하다 <동백아가씨> 작곡가인 백영호에게 발탁돼 1959년 <기타의 슬픔>으로 데뷔했다. 그녀는 주로 부산KBS에서 활동하면서 솔로로 20여 곡의 노래를 남겼다.
이들은 그후 1961년 부산 송도해변에서 만나 “일본 쌍둥이 자매가수 고마도리처럼 듀엣을 만들어 보자!”며 의기투합 했다. 그리고 그 1년 뒤인 1962년 작은방울 김향미가 서울KBS 주최 전국신인가수 선발 노래자랑에 부산대표로 출전, 영예의 1등을 수상한 것을 계기로 이해에(큰방울 박애경의 독촉에 못이겨) ‘은방울자매’를 결성했다.

그리고 곧바로 서울 시민회관 프린스쇼에 출연, 빼어난 하모니를 선보여 뜨거운 갈채를 받았다. 이때 이들의 모습을 본 무대감독(배영달)이 ‘앞으로 대형가수가 될 재목’으로 점찍고, 부산출신 작곡가인 송운선에게 소개해 1963년 불로초(김영일)작사, 송운선 작곡의 데뷔곡 <쌍고동 우는 항구>를 세상에 내놓는다.

데뷔곡의 대히트에 힘입어 <삼천포 아가씨>(1964)와 <무정한 그사람> (1965)을 잇달아서 히트시키고, <마포종점>으로 정점을 찍는다.
그후 작은방울 김향미가 선교활동을 목적으로 미국으로 이민을 가 그 자리에 가수 신해성의 부인인 오숙남이 들어온다. 그러나 2005년 11월 큰방울 박애경이 위암으로 세상을 뜨면서, 3기 멤버로 정향숙이 들어오고 원년멤버 없이 은방울자매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 서울에서 마지막으로 운행됐던 전차 차량

대한제국 시대인 1899년부터 1968년까지 70년간 ‘서울 시민의 발’로서 서울 시내에서 운행되던 노면전차가 곧 서울 전차(電車)였다.

1887년 경복궁 건청궁에 ‘건달불’이라 불린 전깃불이 들어오고, 그 2년 뒤인 1899년 5월4일(음력 4월 초파일) 돈의문(새문안길의 서대문)에서 흥인지문(전기발전소가 있던 동대문)까지 궤도전차 운행이 개통됐다. 세계 최초로 전차가 운행된 게 1881년이었으니, 그후 18년 만에 동방의 한 작은 나라 대한제국에서 전차가 개통된 것이야말로 천지가 개벽할 근대로의 발빠른 질주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전차 개통식이 있었던 날, 당시 동대문에는 구름처럼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개통 다음 날 <제국신문>에서는 전차의 기계적 원리를 소개하는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그 전기거(電機車, 전차를 ‘수레 거’자를 써서 ‘전기거’라 호칭)모양인즉, 그 집 위에로 작대기 같은 쇠 한 개를 전기선 줄에 닿게 세웠는데, 동대문 안에서 기계로 전기를 부린즉 전기기운이 그 작대기를 미는 힘으로 수레가 절로 운동하기를 살 갓듯 하는 것이더라.…”
-<제국신문> 1899년 5월5일자 기사

그러나 개통 9일 만에 종로2가에서 6살 어린아이가 전차에 치여 숨지는 어이없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때 아이의 아버지가 도끼를 들고 전차에 뛰어들고, 반일감정이 격화돼 사람들이 몰려들어 전차를 불태우자 일본인 운전사는 도망갔다. 이 여파로 5개월간 전차운행이 중지되기도 했다. 이때 외신들은 “조선인들이 전차를 ‘악마의 차’로 인식하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 당시 화신백화점 앞을 지나는 ‘만원사례’ 전차모습

대한제국 시기에 4개였던 전차노선은 일제 말기인 1943년에는 16개 노선(총 연장 40.6km, 좌측통행, 역수 72개)이었다. 이때 노선 개설공사로 인해 한양 도성의 성문들과 성곽이 훼손되기도 했다.
이 전차는 1968년 11월28일 동대문역까지 운행한 것을 마지막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때 마지막으로 운행됐던 303호 전차는 2010년 8월 서울시 등록문화재 제467호로 지정돼 서울역사박물관(충정로) 앞에 전시돼 있는데, 보는 이들로 하여금 70년 전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하고 있다.

은방울자매의 히트곡 <마포종점>은 그 시절 서울시내 네 곳의 전차 차고지(종점)의 하나였던 마포종점의 애틋했던 서민정서를 노래로 승화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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