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옛날의 트로트- 노래의 고향을 찾아서

<34> 1950년대의 ‘가요 왕’ 박단마

‘일제강점기에 데뷔해 1950년대까지 활동한 대한민국 가수이자 성악가이자 연극배우이자 뮤지컬 배우다. 장르는 K-POP, 트로트, 신민요.’
박단마(朴丹馬, 1921~1992)의 이력을 간단히 소개한 <위키백과>의 내용이다. 머리를 갸우뚱거리게 하는 얘기들이다.

우선 이름자부터가 평범치 않다. ‘붉은 말’이란 뜻의 한자어 ‘단마’가 본래의 이름인지 그 연유는 알 수 없지만, 이름만 가지고서도 평범치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데뷔 이후 국내에서의 활동기간이 짧아 인기에도 불구하고 일반 대중들의 뇌리에는 깊게 각인되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건 1950년대 이난영, 장세정, 황금심과 함께 인기의 한 축을 형성했던 스타가수였다는 사실이다.

특히 우리 귀에 익은 <나는 열일곱 살이에요>, <맹꽁이 타령>, <슈샤인 보이>, 응원가로 잘 알려져 있는 <아리랑 목동>이란 노래의 원곡 가수가 바로 박단마다.

▲ 데뷔시절 모습

‘천재소녀’로 소문났던 배우 겸 가수
경기도 개성이 고향인 박단마는 어려서부터 대중예술분야에 관심과 ‘끼’가 많았다. 권번(일제강점기의 기생조합) 기생으로 있었던 언니 어깨너머로 배운 민요 가창 실력이 얼마 안 가서는 “언니를 뛰어넘는 실력”이라는 소문이 짜~하니 날 정도였다.

그 덕(?)에 어린나이에 극단 막간가수로 진출해 큰 호응을 얻는가 하면, 이미 13살 때부터 연극·영화며 방송국 무대에서 아역배우 겸 가수로 주목을 받았던 당대의 ‘아이돌 스타’였다.
그러나 박단마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드러낸 건, 그녀의 나이 열 일곱살 때 취입, 발표한 <아이고나 요 맹꽁>(맹꽁이 타령/형석기 작곡)과 <나는 열일곱살>이었다. 특히 당돌한 열 일곱살 소녀의 적극적이고도 직설적인 구애를 경쾌한 리듬에 담아 신민요풍의 창법으로 노래한 이 노래의 히트로 박단마는 일약 스타가수로 떠오른다.

 

      <나는 열 일곱살(이에요)>

1. 나는 가슴이 두근거려요
   아리켜 줄까요 열일곱살이에요
   가만히 가만히 오세요 요리조리로
   별빛도 수집은 버드나무 우 아래로
   가만히 오세요

2. 나는 마음이 울렁거려요
   당신만 아세요 열일곱살이에요
   살며시 살며시 오세요 이리저리로
   파랑새 꿈꾸는 버드나무 우 아래로
   살며시 오세요

3. 나는 얼골이 붉어졌어요
   손꼽아 헤이면 열일곱살이에요
   어서 어서 오세요 꼬불산으로
   언제나 정다운 버드나무 우 아래로
   그대여 오세요

                 (1938, 이부풍 작사/ 전수린 작곡)

 

▲ 악극단 시절. 뒷줄 가운데가 박단마, 아랫줄 가운데는 신카나리아.

황금심의 노래 <외로운 가로등>을 만든 이부풍, 전수린의 작품이다. 이 노래는 박단마의 비트가 섞인 콧소리와 가녀린 애교 섞인 목소리로 강약을 조절하는 경쾌한 신민요풍의 창법으로 가사의 파격이 틀에 박힌 ‘눈물 쥐어짜는’ 전통 트로트에 젖어 있던 당시 대중들에게 신선한 재미와 흥미를 줘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이 노래는 훗날 황금심, 신카나리아, 이미자(1992). 조미미, 하춘화 등의 가수들이 <나는 열일곱살이에요>로 제목을 바꿔 리메이크 해 불렀고, 재즈로도 편곡(이정식)돼 불리기도 했다.

▲ 박단마 그랜드쇼

<아이고나 요 맹꽁>은 박단마의 광복 이전 대표곡의 하나인데, 서양음악적 색채가 가미된 박단마의 개성이 돋보이는 노래다. 이 노래는 1960년대 이후 박재란이 <맹꽁이 타령>으로 제목을 바꾸고 맘보리듬으로 불러 크게 히트했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박재란을 <맹꽁이 타령>의 원곡가수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

‘열애’에 발목 잡혀 미국행 결행
박단마는 해방 후 미8군 무대에 얼굴을 드러내면서 미국식 노래를 많이 불러 자신의 노래 창법이나 노래가 재즈 스타일이 가미돼 확연하게 바뀐 것을 느낄 수 있는데, 그 바탕에는 영어에 한글 토를 달아 노래하는 그녀의 지난한 노력과 집념이 배어 있었다.

이 당시의 일화를 1세대 패션디자이너인 노라노(본명 노명자)씨의 자서전 내용을 통해 살펴보자.
“가수 박단마는 빼놓을 수 없는 쇼걸이었다. 내가 의상을 담당한 미8군 쇼단의 멤버였던 그녀와 만난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친해졌다. 나는 그녀의 노래와 인간적 매력에 사로잡혔다.… 나는 그녀가 미8군 쇼에서 부를 팝송에 한글로 토를 달아주고, 대·중·소로 감정표출 할 곳을 표시해 주곤 했다.… 명동의 시공관에서 열리는 박단마 1인 라이브쇼를 위해 나는 타프타 벨트가 달린 검은색 비로드 드레스와 구슬을 목 밑으로 늘어뜨린 것을 디자인 했다. 무당부채를 들고 나타난 그녀는 느릿한 가락으로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를 부르다가 갑자기 갓을 벗어던지며 ‘슈, 슈, 슈, 슈샤인 보이~’하고 빠른 템포의 노래로 넘어갔다. 그 순간 극장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런 아이디어를 생각해 낼 수 있었던 박단마야말로 천재적인 가수이자 쇼걸이라 생각한다.”

1945년 8.15광복을 전후해 반도악극좌, 신태양, K.P.K악단, 샛별악극단 참여와 자신이 이끌던 박단마 그랜드쇼단의 운영에 이르기까지 인기를 한 몸에 모았던 박단마의 발목을 잡은 건, 미군 헌병장교와의 열애였다.

<슈샤인 보이>(1954), <아리랑 목동>(1956)이 한창 뜰 무렵, 미군과의 열애에 빠져 그 미군의 아들을 낳았고, 그 아이의 아버지를 찾아 1957년 미국으로 떠났다. 모든 활동이 올스톱 되고, 자연스레 가수 활동에 기나긴 공백이 이어졌다. 훗날 1977년 일시 귀국해 음반을 취입(오아시스 레코드사) 발매했으나, 팬들은 이미 박단마를 까맣게 잊은 뒤였다.

그녀는 그렇게 영영 잊혀지는 듯 했다. 그러나, 그녀가 부른 <아리랑 목동> (1956, 강사랑 작사 / 박춘석 작곡)은 1963년에 여성듀엣 김치켓과 코요테가 2002년 월드컵 응원가로 리메이크해 히트시키면서 젊은이들의 애창 응원가로 되살아났다.

 

            <아리랑 목동>

  (야야 야야야야 야야야야야야야~)
1. 꽃가지 꺾어들고 소멕이는 아가씨야
   아주까리 동백꽃이 제아무리 고와도
   몽매간에 생각사자 내사랑만 하오리까
  *아리아리 동동 쓰리쓰리 동동
   아리랑 콧노래를 들어나 주소
2. 남치마 걷어 앉고 나물캐는 아가씨야
   조롱조롱 달륭개가 제아무리 귀여워도
   야월삼경 손을 비는 내 정성만 하오리까
  *아리아리 동동 쓰리쓰리 동동
   아리랑 쌍피리나 들어나 주소

 

그러나 정작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에 정식으로 미국이민을 가 외부와의 접촉없이 토렌스에서 고독한 말년을 보냈다. 그러던 중 심장마비로 로스앤젤레스의 한 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뒤 ‘종교적 이유’로 수혈을 거부, 71세로 쓸쓸히 세상을 떴다.

 

▲ 극장쇼 포스터

TV 수상기가 전국적으로 보급되기 전인 1960년대. 특히 유명 연예인들을 직접 보기 어려웠던 그 시절에, 영화와 함께 유명 영화배우나 가수를 직접 구경할 수 있었던 극적인 공간이 ‘극장 쇼’였다.
연예인의 대중적 인기 등급에 따라 극장도 등급이 나뉘었다. 흥행을 염두에 둔 조치였다. 당시 대중연예인들이 현장에서 팬들을 만날 수 있는 최고의 꿈의 무대는 단연 서울의 시민회관 이었다.

그리고 대한극장 등 몇몇 일류 개봉관과 2~3류 변두리 극장들… 낙원, 키네마, 한일, 남대문, 노벨, 천일, 화양, 동양, 시대, 연흥, 제일, 신영, 천호, 미도, 서울극장 등의 건물에는 유명배우와 가수들, 코미디언과 쇼걸들 모습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리사이틀’ 간판이 내걸려 일반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쇼가 열리는 날은 아침부터 극장 앞이 입장을 기다리는 관객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 나훈아 시민회관 리사이틀 포스터(광고용)

‘극장 안에 들어가 보면, 지정석은 아예 무시돼 있으니, 빈대떡 포개듯 관객들로 꽉 차있다. 휘황찬란한 오색조명이 울긋불긋한 무대를 비추면 인기가수가 등장, 미친듯이 노래를 부른다. 어느 가수는 양복저고리를 벗어 팽개치고, 어느 가희는 광인처럼 몸을 흔들고… 하아드 아이스크림을 빨던 앞줄의 소년들이 기성을 발하며 무대로 뛰어오른다.’

당시 지방 3류극장의 극장쇼 풍경을 스케치한 대중연예잡지의 현장르포 기사의 일부다. 이 극장 쇼는 ‘리사이틀’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1970년대까지 유행됐는데, 1980년 컬러TV의 등장과 함께 ‘3류 쇼’로 서울의 변두리와 지방에서 겨우겨우 옛모습을 유지하다 시들시들 사라져 갔고, 지금은 ‘효도잔치’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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