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옛날의 트로트- 노래의 고향을 찾아서

<33>‘제2의 이난영’장세정

▲ 어떤 이유에서인지 장세정의 히트곡 앨범들은 모두 이 사진으로 장식돼 있다.

일제 강점기 ‘제2의 이난영’ 소리를 들으며 당대 여가수 ‘넘버 투(2)’의 위치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린 장세정(張世貞, 1921~2003)의 유년시절은 외롭고도 불우했다.
평안도 평양에서 출생한 장세정은, 생후 두 달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는 만주 독립단에 들어갔다는 둥 소식마저 끊긴 상황에서 늙으신 할아버지·할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그런 가슴아픈 서러움과 외로움을 남몰래 노래로 달래는 게 어린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그러다 10대 중후반 무렵에 평양 시내에 있는 화신백화점 악기코너에 점원으로 취직했다. 각종 레코드사와 가수들의 음반과 축음기, 악기 등을 판매하는 점포여서 노래를 좋아하던 그녀로서는 가게 분위기가 그닥 낯설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일생의 크나큰 일대 전기가 찾아 온다. 1936년 가을, 평양방송 개국기념 가요콩쿠르가 열리고, 여기서 그녀가 우승을 거머쥔 것. 때마침 평양에 출장왔다가 이 모습을 본 오케레코드사 이철 사장이 앞뒤 가릴 것 없이 그녀를 스카웃한다. 열여섯 살 장세정의 가수인생의 시작이다.

일생 일대 최대히트곡 <연락선은 떠난다>
1937년, 첫 데뷔곡 <연락선은 떠난다> (박영호 작사·김송규 작곡) 유성기 음반이 ‘평양이 낳은 가희(歌姬)’라는 광고문구를 이마에 달고 나왔다. 관부연락선의 이별의 정한과 비애감을 노래한 이 노래는 세상에 나오자 마자 인기폭발이었다. 작곡가 김해송(본명 김송규)의 ‘명품’으로까지 일컬어지기도 하는 이 노래는 장세정 일생 일대 최대의 히트곡이 됐다.

흡사 안개에 젖은 것같은 청초하면서도 교태스럽기까지 한 콧소리에 차마 숨을 삼키다 마는 듯한 발음, 그리고 간드러진 엔카식 창법, 거기에다 애간장을 끊어내듯한 절절하고도 애달픈 노랫말이 듣는 이들을 뇌쇄(惱殺)시키기에 충분했다.

 

<연락선은 떠난다>

(대사) “부산항, 그 한많은 부두에는 뼈에 사무치는 원한의 한숨이 점점이 서려 있고,관부연락선-그 연락선 갑판 위에는 피눈물로 얼룩진 한많은 사연들이 서리서리 젖어 있습니다.”

1. 쌍고동 울어울어 연락선은 떠난다
   잘 가소 잘 있소 눈물젖은 손수건
   진정코 당신만을 진정코 당신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눈물을 흘리면서
   떠나갑니다 “아이, 울지 마세요”
   울지를 말아요

2. 파도는 출렁출렁 연락선은 떠난다
   정든 님 부껴안고 목을 놓아 웁니다
   오로지 그대만을 오로지 그대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한숨을 생키면서
   떠나갑니다 “아이, 울지 마세요”
   울지를 말아요

3. 바람은 살랑살랑 연락선은 떠난다
   뱃머리 부딪는 안타까운 조각달
   언제나 임자만을 언제나 임자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끝없이 지향없이
   떠나갑니다 “아이, 울지 마세요”
   울지를 말아요

                (1937, 박영호 작사 / 김송규  작곡)

 

이 노래는 훗날(1951년) 일본의 ‘엘레지의 여왕’으로 일컬어지는 스가와라 츠즈코(菅原都都子)가 <연락선의 노래>라는 제목의 일본어 노래로 취입 발매해 일본에서도 큰 인기를 얻기도 했다.

▲ 일본 도쿄에서의 조선악극단 일행.맨오른쪽이 이화자,그 옆이 장세정. 왼쪽에서 네번째(가운데)가 이난영 이다.

<울어라 은방울>, <고향초>도 히트
그녀의 <연락선은 떠난다>에 버금가는 그녀의 히트곡으로 <울어라 은방울>(1948)과 <고향초>(1952)를 꼽을 수 있다. <울어라 은방울>은 1948년 해방된 조국에 대한 기쁨과 희망을 노래한 조명암·김해송의 역작으로 얘기된다. 1941년 발표한 <역마차>를 개작한 것으로 짤랑짤랑 따각따각 경쾌한 말방울과 말발굽 소리가 노래의 시작을 연다.

 

           <울어라 은방울>

1. 은마차 금마차에 태극기를 날리며
   사랑을 싣고 가는 서울 거리냐
   울어라 은방울아 세종로가 여기다
   인왕산 바라보니 달빛도 곱네

2. 연보라 코스모스 가슴에다 안고서
   누구를 찾아가는 서울 색시냐
   달려라 은마차야 보신각이 여기다
   가로수 흔들흔들 네온빛 곱다

3. 성당의 음악종이 은은히도 들리면
   자유가 나래치는 서울 지붕 밑
   뭉치자 젊은 가슴 새 희망을 위하여
   건설의 청춘복지 어서 달리자

                (1948, 조명암 작사 / 김해송 작곡)

 

이 노래는 작사·작곡자의 ‘월북’이라는 굴레에 갖혀 대중적 인기를 제대로 끝까지 누려보지 못하고 금지곡으로 지정되는 불운을 안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원곡 <역마차>는 1956년 옥두옥이 미국 빅터레코드에서 영어로 번안해 취입 발표함으로써 ‘한국 최초로 미국에 진출한 가요’라는 진기록을 갖고 있기도 하다.

<고향초>는 애초 송민도가 부른 노래인데, 대구 피란시절 작곡가 박시춘의 권유로 리메이크해 불렀다. 그런데 오히려 원곡가수보다 더 히트해 많은 이들이 장세정을 원곡가수로 알고 있을 정도다.
<즐거운 목장>, <샨프란시스코>도 이 무렵 같이 인기몰이를 하기도 했다.

▲ 장세정이 멤버로 참여한 우리나라 최초의 걸그룹 ‘저고리 시스터스’.

서울 수복 후에는 서울에서 유니버살레코드사와 악기점, 스튜디오를 직접 운영하기도 했는데, 그 전에는 주로 작곡가 김해송과 이난영이 이끌던 KPK(케이 피 케이)악단에서 악극에 주로 출연했다. 이 무렵 일본에서 귀국한 탱고 밴드마스터 한두식과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한참 뜰 무렵에는 <눈물젖은 두만강>을 부른 가수 김정구와 <만약에 백만원이 생긴다면>, <춘풍신호> 등의 코믹한 만요를 불러 히트, 그녀의 또다른 기량을 보여주기도 했다.

▲ 1951년 장세정의 <연락선은 떠난다>를 <연락선의 노래>란 제목으로 바꾸고 일본어 가사로 불러 일본에서 히트시킨 스가와라 츠즈코.

그러나 세상이 바뀌어 1970년대에 들어서자 자신이 불러 히트를 시킨 박영호·조명암·김해송의 노래들이 월북작가들이란 이유로 금지곡으로 묶인데다가, 지난 날(1941년)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대표적인 친일가요 <지원병의 어머니>(조명암 작사·고가 마사오 작곡)를 불렀던 전력이 낙인찍혀 ‘친일가수’로 분류돼 입지가 좁아지면서 정신적 고통을 겪게 됐다.

▲ 휠체어를 타고 왕년의 콤비 김정구와 무대에 올라 눈물짓는 장세정의 말년 모습.(1988 KBS가요무대 LA 공연)

결국 미국이민을 결심(1973년), 이 정든 땅을 떴다. 그리고 1978년 LA에서 은퇴공연을 가졌는데, 그후 지병인 고혈압 악화에 의한 실어증과 뇌졸중으로 고생하다 2003년 그 많은 한을 내려놓지 못하고 이국 땅에서 82세로 이 세상을 떠났다.

 

▲ 관부연락선 도쿠주 마루호.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은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고통받고 있던 조선 민중의 아픔과 민족적 시련이 응축돼 있던 조선침탈 상징물의 하나다.
부산(잔교역)과 일본 시모노세키(下關)를 연결하던 일본 철도성 소속의 연락선으로, 1905년 9월 일본 산요기전주식회사가 개설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1945년 6월까지 운항했다.

식민지 조선의 경부선과 일본 본토의 산요 본선을 잇는 철도 노선의 연장선으로 인식한 일제는, 대륙과 조선 침탈에 필요한 물류수송의 중간기지로 이 노선을 활용했다.
총 항로거리는 240km. 1930년대 후반 수송승객은 100만 명, 1940년대에는 200만~300만 명에 달했는데 주로 유학생과 사업가, 일용직 부두노동자와 징용·탄광노동자들을 실어 날랐다.

▲ 관부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에서 연인과 동반 투신자살한 윤심덕

이 관부연락선은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로서 노래 <사(死)의 찬미>를 부른 윤심덕이 1926년 8월4일 도쿠주마루호 관부연락선을 타고 가다 대마도 인근 현해탄에서 그녀의 유부남 애인으로서 동경 유학생이던 김우진과 동반 투신자살을 함으로써 세상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금은 민간이 운영하는 부관페리호가 취항해 여전히 부산항과 시모노세키항을 부산하게 오간다.
일제 강점기의 가수 장세정의 1937년 데뷔곡 <연락선은 떠난다>는 바로 이 관부연락선의 비애감을 일본 엔카 풍(演歌 風)으로 노래한 절창의 트로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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