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옛날의 트로트- 노래의 고향을 찾아서

<30> 신민요풍 노래의 부활

▲ <눈물의 연평도>노래비(연평도 전망대 조기전시관 앞)

6.25 전쟁의 뼈 아픈 시련과 아픔을 겪으면서, 동시에 미국문화 유입 등 어수선한 사회변화의 분위기 속에서도 우리의 전통 트로트는 꿋꿋하게 주도적인 자리를 지켰다.
그런 한편으로는 과거 이은파-이화자-황금심-황정자로 이어지는 타령조의 소위 신민요풍 트로트들이 봇물 터지듯 일대 성시를 이뤘다. 흡사 그것이 우리민족 본디의 정서임을 확인시켜 주기라도 하듯이. 최숙자·최정자가 이때의 대표주자였다.

 

(1) 최숙자 <눈물의 연평도>

         

▲ <눈물의 연평도> 앨범 재킷.

<눈물의 연평도>

1. 조기를 담뿍 잡아 기폭을 올리고
   온다던 그 배는 어이하여 아니 오나
   수평선 바라보며 그 이름 부르면
   갈매기도 우는구나 눈물의 연평도

2. 태풍이 원수더라 한 많은 사라호
   황천 간 그 얼굴 언제 다시 만나보리
   해 저문 백사장에 그 모습 그리면
   등대불만 깜박이네 눈물의 연평도

                      (1963, 김문응 작사/ 김부해 작곡)

 

조기 한 바가지에 물 한 바가지…
한창 조기가 잡히던 1950~ 60년대 연평도 바다가 그랬다. 그래서 ‘바다 시장’인 파시(波市)가 서고, 조기잡이 배들이 조기를 좇아 고기떼처럼 연평바다로 몰려들었다.
그러다 ‘원수같은’ 사라호 태풍이 덮치고, 이때 조기떼를 좇아 연평바다로 나갔던 어장애비들이 ‘황천길’을 떠나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불귀(不歸)의 객(客)’이 됐다. 1959년 9월의 일이었다.
<눈물의 연평도>는 악몽같던 그 사라호를 기억하는 살아남은 자들의 피맺힌 눈물과 한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10년 전 11월, 북한의 기습 포격 도발로 연평도는 다시금 잠못 이루는 눈물의 섬이 됐다.

1960년대 전통트로트는 최숙자 전성시대!
우리 트로트 역사상 1960년대는,더도 덜도 할 것 없이 최숙자(崔淑子, 1941~2012)의 전성시대였다. 열 여섯살 나던 해인 1957년 데뷔, <개나리 처녀>를 그야말로 ‘맛깔나게’ 부르면서 스타덤에 올랐다.

이때의 최숙자를 흔히들 ‘신민요 창법으로 부르는 민요가수’라고 불렀다.
볼륨감 있는 목소리로 특유의 목소리 꺾기를 구사하며, 구성지고도 유정하게 흘러가는 그녀의 노래에서는 엘레지풍의 슬픔마저 느껴졌다.
최숙자의 최대 히트곡은 <눈물의 연평도>(1963). 그외에도 김세레나와 1, 2절을 나눠 부른 <갑돌이와 갑순이>, 영화주제가 <모녀기타>(1964), <그러긴가요>, <나룻배 처녀>, <초립동> 등이 잘 알려져 있다.

▲ 당시 최고스타였던 최숙자와 무명이었던 이미자 모습.

여기서 1964년 <동백아가씨> 노래에 얽힌 일화 하나.
 이 노래는 애초 최숙자에게 부르게 할 노래였는데, 당시 톱가수였던 최숙자의 개런티가 너무 부담될 것을 우려해 레코드사(지구)측이 작곡가인 백영호에게 신인급 가수를 찾아봐 줄 것을 요청했다. 이때 발탁된 가수가 무명신인에 가까웠던 이미자였고, 예상치 못한 대박을 터뜨리면서 이미자는 스타 반열에 오르게 된다. 가요계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얘기다.(그 뒤 최숙자와 이미자는 절친으로 지냈다.)

그럼에도 무대보다는 주로 음반과 방송을 통해 노래활동을 했던 그녀는 1977년 홀연 국내에서의 모든 활동을 접고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갔다.
그리고 2012년 고혈압에 의한 뇌졸중으로 쓰러져 끝내 회생하지 못하고, 남편과 1남3녀의 자녀들을 이승에 남겨둔 채 71세의 나이에 먼저 저승으로 갔다.

 

(2) 최정자 <초가삼간>

                 

▲ 최정자의 지구레코드사 전속기념 앨범 재킷

<초가 삼간>

1. 실버들 늘어진 언덕 위에 집을 짓고
   정든 님과 둘이 살짝 살아가는 초가삼간
   세상살이 무정해도 비바람 몰아쳐도
   정이 든 내 고향
   초가삼간 오막살이 떠날 수 없네

2. 시냇물 흐르면 님의 옷을 빨아널고
   나물 캐어 밥을 짓는 정다워라 초가삼간
   밤이 되면 오손도손 호롱불 밝혀놓고
   살아온 내 고향
   초가삼간 오막살이 떠날 수 없네

                         (1967, 황우루 작사/작곡)

 

“청음(淸音)의 꾀꼬리 목소리로 신민요풍의 노래를 잘 불렀다.” 작사가 고 정두수의 생전 최정자(崔貞子, 1944~미국 거주)에 대한 회고다.

▲ 2012년 잠시 귀국해 방송(가요무대)에 출연했을 때의 최정자 모습

뛰어난 리듬감각·가창으로 노래맛 한껏 살려
최정자는 경기도 개성 출신으로 1960년 열일곱 나이에 <월남에서 보내주신 오빠의 편지>로 데뷔했다. 파월장병들에게 한창 위문편지를 썼던 당시 사회상황이 읽히는 노래다.
그러나 그녀를 스타가수로 올라서게 한 건, 뛰어난 리듬감각으로 살갑게 노래의 맛을 한껏 살린 황우루(1942~ 1980) 작사·작곡의 <초가삼간>(1967)과 <고향산천>(1968), 그리고 이철혁 작곡의 <처녀농군>(1968) 이었다.

작곡가 황우루와는 한때 부부의 연을 맺었던 사이. 황우루는 이금희의 <키다리 미스터 김>, 이씨스터즈의 <울릉도 트위스트> 등 1960년대에 무수한 히트곡을 남긴 유명 작곡가였다.
개인적인 이유야 세세히 알 수 없지만, 최정자 역시 국내에서의 가수활동을 접고 미국 시카고로 이민을 가, 한때 사망 소문이 났을 정도로 국내 가요팬들과는 멀어졌다.

그러다가 2012년 그녀의 팬카페 <그리운 노래 초가삼간> 초청으로 잠시 귀국, 공연과 방송출연을 통해 그녀의 왕년의 히트곡들을 들려주기도 했다.
비록 머나먼 타국으로 이민을 가 그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3500여 명의 회원들로 짜여진 팬카페 <그리운 노래 초가삼간>에 접속하면, 그녀의 근황 소식과 그녀의 옛노래들을 추억과 함께 만날 수 있다.

 

▲ 우리나라 최초의 라디오 ‘금성 A-501’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라디오는, 지금으로부터 61년 전인 1959년 금성사(GOLD STAR, 지금의 엘지전자)가 만든 라디오 ‘금성 A-501’이다. ‘A-501’은 교류전류(AC)를 쓴 진공관 5구 라디오 1호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 라디오방송국인 정동 경성방송국이 개국돼 첫 전파를 쏜 1927년 이후 32년 만의 일이다.

이 라디오는 전력사정이 좋지 않은 우리나라의 형편을 고려해 50V 전력으로 작동되게 설계됐다. 특히 전원스위치, 새시(sash, 금속재료로 된 창틀), 트랜스(변압기) 등 부품 60%를 국산화 했으며, 국내 처음으로 디자인을 도입한 가전제품으로서, 이 라디오를 통해 전자회로 설계 등 국산 기술발전의 수준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개발 첫 해 생산량은 모두 87대. 몸통의 색깔은 백색, 민트색 등 5가지였는데, 대당 가격이 2만 환에 달하는 고가품에 속했다.(당시 금성사 대졸사원 월급이 6천 환 이었으니, 석달치 월급을 가지고도 사지 못할 가격이었다.)

아무튼 왕관 모양의 ‘금빛 샛별’-즉 ‘금성’(GOLD-STAR) 로고가 붙은 이 라디오는, 우리나라 가전제품의 대명사가 되면서 1960~70년대 ‘라디오 전성시대’를 열었다.
이 국산라디오가 보급되기 전에는 미군기지 피엑스(PX)를 통해 미제 제니스 진공관 라디오와, 내쇼날·파나소닉 등의 일제라디오가 부대 밖 기지촌으로 흘러나와, 석유등잔불 켜는 시골집에서 가슴뻐근한 ‘재산목록’의 하나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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