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옛날의 트로트- 노래의 고향을 찾아서

▲ 방송(가요무대)에 중절모 차림으로 출연해 노래부르는 만년의 윤일로 모습.

<29> 미남가수시대의 윤일로·손시향

(1) 윤일로 <기타부기>

6.25 전쟁 후 흡사 쓰나미처럼 밀어닥친 미국의 대중음악 리듬은 분단과 전쟁의 아픔이 절절하게 녹아있는 기왕의 전통 트로트들을 일시 잠재우며, 춤바람과 사치, 허영에 빠져든 사람들을 달디단 향락의 세계로 이끌었다. ‘마시고 또 마시어 취하고 또 취해서’ 한 번뿐인 인생, 춤추며 즐겨 보자고 노래한다.
1959년 윤일로(尹一路, 1935~2019:본명 윤승경)를 데뷔 4년여 만에 그 역설적인 가사와 절로 신명나게 하는 부기우기 리듬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은 노래가 <기타부기>다.

           

▲ 윤일로의 최대 히트곡 <기타부기> 앨범 재킷

<기타부기>

1. 인생이란 무엇인지 청춘은 즐거워
   피었다가 시들으면 다시 못필 내 청춘
   마시고 또마시어 취하고 또취해서
   이 밤이 새기 전에 춤을 춥시다
   부기부기 부기우기 부기부기 부기우기
   기타 부~기

2. 인생이란 무엇인지 청춘은 즐거워
   한번 가면 다시 못올 허무한 내 청춘
   마시고 또마시어 취하고 또취해서
   이 밤이 새기 전에 춤을 춥시다
   부기부기 부기우기 부기부기 부기우기
   기타 부~기

                  [1959, 이재현(본명 이재호) 작사·작곡]

 

잘 생긴 만능 예능인…여성들에 인기
‘부기우기(BoogieWoogie)’는 로큰롤과 리듬 앤 블루스의 시원이 된 리듬으로 1920년대 후반에 대중화된 ‘빠른 재즈댄스 음악’이다. 이것은 1960년대에 들어서서 트위스트로 발전한다.
평안남도 양덕이 고향인 윤일로는 짙은 눈썹의 잘 생긴 얼굴에 작사·작곡·노래를 두루 꿴 싱어송라이터에 엠씨(MC)까지, 만능에 가까운 재주와 타고난 끼를 가지고 있어 특히 여성팬들의 인기가 많았다.

그는 11살 때 월남해 정착한 인천의 송도고교 축구선수 시절부터 해군을 제대할 때까지 전국 가요콩쿠르에서 20여 차례 우승해 주목을 받았다.
결국 그를 눈여겨 본 작곡가 나화랑에게 발탁돼 1955년 <너 없는 세상이란>, <그림자 한 쌍>을 취입해 내놓으면서 본격적으로 가수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나화랑이 재주많은 그에게 “한 길로 가라”며 윤일로(尹一路)란 예명을 지어줬다.

그는 <기타부기>로 스타덤에 오른 이후, 댄스뮤직으로 전성기를 구가하며 <항구의 사랑>(1959)을 연이어 히트시키고, 파월장병의 향수를 노래 한 <월남의 달밤>(1966)으로 제2의 전성기를 누렸다.
이렇듯 195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250여 곡의 노래를 발표했는데, 그 중에는 자작곡이 50여 곡에 이른다.(그의 아내 박수전씨 역시 <사랑의 물새 한 쌍>이란 노래를 부른 가수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늘 스마트한 모습으로 중절모를 쓰고 다녀 ‘로맨스 그레이’란 별명이 붙기도 했는데, 지난해인 2019년 연말에 자신이 놀이터 삼아 ‘한도 없이, 원도 없이’ 즐기며 살았을 이 세상의 인연들을 툴툴 털고, 84세에 세상을 떠났다.

 

▲ 손시향의 최초·최대 히트곡 <검은 장갑>이 수록된 앨범 재킷

(2) 손시향 <이별의 종착역>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우리 대중음악의 태깔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전통 트로트의 주도 속에 서양 대중음악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형식의 음악, 이를테면 이지리스닝 계열의 스탠다드 팝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작곡가 손석우(孫夕友, 1920~2019)가 그 흐름을 주도하며 발굴한 가수들이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를 부른 한명숙과 최희준 등 미8군 무대 출신의 가수들이었다.
손시향(孫詩鄕, 1938~재미)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남성4중창단인 블루벨즈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신성일과 고교 동창
목소리는 ‘한국의 짐 리브스’

경북 대구가 고향으로 본명이 손용호인 손시향은 미남스타 고 신성일과 대구 경북고 동창이라서 많은 화제를 뿌렸다.(손시향의 부모, 가족얘기 등 주로 신성일의 입을 통해 뿌려진 얘기들이었다.) 훗날 신성일은 자신의 무명시절 스타가수가 된 손시향에 자극돼 영화배우의 길에 들어서서 매진하게 됐노라고 실토한 적이 있었다.

아무튼 손시향은 대학(서울대 농과대) 때부터 이미 스타였다. 영화배우 뺨치는 잘 생긴 외모에, 알토 톤으로 낮게 깔리는 신비한 감미로운 목소리, 그리고 부유한 가정배경에 이르기까지… (그는 항상 정장 차림에 백구두를 신고 다녀 ‘마카오 신사’라는 별명이 붙은 것 외에도, 노래 부르는 소프트한 목소리가 흡사 미국의 컨트리 가수 짐 리브스를 닮았다 해 ‘한국의 짐 리브스’라 불리기도 했다.)
손시향은 대학시절 KBS 노래자랑을 통해 가요계에 입문해 이미 열여덟 살 때 <브레이브 맨(용감한 사나이)>이란 곡으로 데뷔를 했다. 그리고 작곡가 손석우를 만나 콤비를 이뤄 <검은 장갑>(1958)을 불러 크게 히트시켰다. 이 노래의 히트로 시중에는 검은 장갑이 일대 유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이태 뒤에 흡사 황혼 녘에 말을 타고 터벅터벅 떠나가는 ‘황야의 무법자’를 연상시키는 슬로우 리듬의 통기타 선율을 바닥에 깔고, 혼자 남겨진 남자의 처연한 내면 독백을 노래한 <이별의 종착역>의 연이은 히트로 그만의 튼튼한 노래성을 쌓게 된다. 특히 젊은 층과 여대생들이 그의 부드러운 도시적 감각이 묻어나는 노래에 열광했다. 예명도 ‘시향’-시의 고향 임에랴… 노래 히트에 따라 영화도 만들어졌다.

          

▲ <이별의 종착역> 앨범재킷

<이별의 종착역>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외로운 이 나그네길
음~안개깊은 새벽 나는 떠나간다 이별의 종착역

사람들은 오가는데 그이만은 왜 못오나
음~흐린 달빛 아래 나는 눈물진다 이별의 종착역

* 아~언제나 이가슴에 덮인 안개 활짝개고
아~언제나 이가슴에 밝은 해가 떠오르나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고달픈 이 나그네길
음~비바람이 분다 눈보라가 친다 이별의 종착역
(휘파람 후렴~)

                                    (1960, 손석우 작사·작곡)

 

이 노래는 특히 훗날 언더그라운드 록스타로 신촌블루스 그룹의 원년 멤버였던 김현식(1958~1990)이 1990년 팝스타일로 리메이크해 불러 젊은 층의 인기를 소환시키기도 했다. 김현식은 이 노래를 부른 바로 그 해에 시퍼런 서른세 살 나이로 이승과 결별하고 저승으로 갔다.

손시향은 그 외에도 <비오는 날의 오후 세시>, <사랑이여 안녕> 등의 노래를 부르고 한창 인기를 누릴 때인 1960년, 미국의 마이애미로 이민갔다. 그곳에서 미국 여인과 결혼도 하고, 마이애미 대학에서 뮤지컬 코미디 공부도 하면서 ‘리손(Lee Sohn)’이란 이름으로 가수활동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올해 83세… 지금 그는 망구(望九, 90을 바라보는 나이)에 인생의 황혼길, 우리 모두가 이별해야 할 그 종착역을 향해 아주 느릿하게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 국내 최초 19인치 흑백TV ‘금성 VD-191’

이제는 TV 시대 !

우리나라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국이자 최초의 상업방송국은 1956년 5월12일 한·미 합작으로 한국 알 씨 에이(RCA)가 설립한 ‘코캐드(Korcad)-TV’다.
세계에서는 15번째, 아시아에서는 4번째의 텔레비전 방송국 개국이다.
호출부호는 ‘에이치·엘·케이·제트(HLKZ) -TV’. 서울지역을 가시청권으로 해서 이틀에 한 번 격일로 저녁 8시~10시까지 2시간씩 정규방송을 내보냈다.

‘활동사진이 붙은 라듸오’로 광고된 이 낯도깨비같은 텔레비전 방송을 보려고 서울역·탑골공원에 설치된 텔레비전 수상기 앞에는 사람들이 시장판처럼 몰려드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사람들은 이 TV방송국을 ‘종로방송국’이라 불렀다.

그러다 경영난으로 한국일보(사장 장기영)로 경영권이 넘어가 대한방송(DBS)으로 개편됐다. 이후 미국 에이·에프·케이·엔(AFKN) 텔레비전의 도움을 받아 겨우겨우 이끌어 가다 1961년 12월31일 KBS-TV(채널 9)로 흡수돼 국영방송으로 개국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본격적인 TV시대 개막의 발판이 마련된 것이었다.(참고로 라디오의 경우는 1927년 2월16일 정동 경성방송국에서 첫 전파를 발사했다.)

이어 1964년 민간(삼성그룹) 방송인 동양텔레비전(TBC-TV), 1969년에는 문화방송(MBC-TV)이 각각 개국했다.
또한 1960~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들 국·민영 방송국들이 서울과 지방에 속속 지역방송국들을 개국하면서 명실상부한 TV전국시대를 열었다.

그러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 전두환 군부정권의 ‘언론 통폐합’ 지침에 따라 TBC-TV는 KBS-2TV로, MBC는 주식 상당분을 KBS가 흡수하는 형식의 인수합병의 진통을 겪기도 했다.
그후 20년만인 1981년, 컬러 TV 방송이 전면 실시되고, TV수상기 보급이 전국 가정의 80%를 넘어서면서 ‘안방극장 시대’가 열리게 됐다.

TV수상기는 금성사(지금의 엘지)가 국내 최초로 ‘골드 스타(GOLD STAR)’ 상품명을 단 국산 19인치 흑백 TV ‘VD-191’ 제품을 개발해 500대를 한정 출시했다. 그런데 한 대당 가격이 무려 쌀 27가마니와 맞먹어(6만5310원) 일반 서민들은 쉽사리 엄두도 못 내던 사치품에 가까웠으니… 실로 금석지감을 금치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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