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자매네 반디농장 김영란의 전원일기④

아이들이 날 그리워하고
이정표 삼을 때쯤
아이들의 수호신이 돼
하늘에서 웃고 있겠지...

나의 엄마가 살아계셨을 때는 연민의 대상이었고, 돌아가시고 나서는 내 안에서 수호신이 돼 주셨다. 고생만 많이 하신 생전의 모습 때문에 가슴 아픈 기억과는 달리 돌아가시고 나서 나의 엄마는 내 삶의 등대가 돼 힘들 때마다 떠오르면서 길잡이 역할을 해 주셨다.
‘엄마는 나보다 더 힘드셨을 텐데...’ 그 생각만으로도 시나브로 힘이 솟기 시작했다. 추억의 사진첩을 떠 올릴 때마다 한 편씩 떠오르는 엄마의 모습.

아부지는 풍운아셨다. 경제적인 유전자보다 이상적이고 문학적이었던 아부지가 사업을 하신 것 자체가 엄마와 가족에게는 위태로운 운명을 예고했다. 아부지는 산골에서 금광을 하셨다. 규모도 제법 컸으나 인부가 버린 담배꽁초가 발화해 금광이 붕괴돼 인명사고가 나는 바람에 우리 집은 풍비박산 났다.

빚더미에 올라앉아 끼니를 걱정해야 했을 때, 엄마는 가시덤불 아카시아밭을 개간해 감자를 심었다. 엄마는 돼지를 키워서 거름을 만들었고, 그 거름으로 감자를 키우니 굵은 감자가 알알이 쏟아져 나왔다. 다섯 아이를 그냥 앉아서 굶어죽일 수는 없다는 모성애가 엄마로 하여금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게 했다. 늘 감자밥을 먹어서 나는 지금도 감자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1960년대 말, 그 시절에는 우리나라가 새마을운동을 시작하면서 부흥하기 시작한 때라 누구나 곤궁했고, 굶지 않고 사는 것이 지상과제였다. 아이 키우기 어려운 사람들은 도시로 식모살이나 공장으로 보냈다. 하지만 엄마는 내 아이를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겠다며(입양)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십리길이나 되는 국민학교를 다니던 내가 하굣길에 보면 엄마가 개울에서 자갈을 캐고 계셨다. 자갈 한 차에 얼마를 받는데, 그렇게 장만한 돈으로 내 위의 언니를 중학교에 보냈다. 장갑도 없던 시절, 맨손으로 일하는 엄마는 손이 거북이 등처럼 갈라지고 푸석했지만, 늘 다른 사람보다 두 배로 일을 했다.

20리나 되는 중학교에 매일 걸어 다녀야 했던 언니와 10리길 학교를 다니는 우리 때문에, 엄마는 형편이 나은 삼촌에게 집을 부탁해서 읍내로 나오게 됐다. 우리는 호롱불에서 해방돼 전깃불 세상을 만났다. 내 유년의 아름다운 추억도 거기서 멈췄다.
내게는 엄마가 있어서 고생의 기억이 아니라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금광에서 실패한 아부지는 바람처럼 집을 나가셨다가 며칠 만에 돌아오시곤 했다. 아이들은 오로지 엄마 몫이었다.

그때 그 시절. 우리도, 나라도 가난했지만 오직 잘 살아보겠다는 열망으로 온 나라가 역동적인 분위기였다.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을 이뤘고, 우리도 엄마의 보살핌을 받고 쑥쑥 자라났다. 이제 세 아이의 엄마가 된 내가 이 나이에도 엄마를 늘 떠올리는 건, 내 삶이 버거울 때는 엄마가 내 안에서 늘 힘을 돋워줬기 때문이다. 나도 어쩌다가 농부가 돼 엄마의 삶을 답습하면서, 그래도 내가 사는 세상은 훨씬 더 여유로운 세상이었기에 스스로 고무할 수 있었다.

아부지의 유전인자와 엄마의 유전인자가 반씩 섞인 나는 땀 흘려서 황소처럼 일하다가도 바람처럼 제주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나를 달래곤 했다. 새까맣게 햇빛에 그을었고, 손이 나무껍질 같은 시골엄마인 나를 아이들이 그리워하고, 이정표로 삼을 때쯤, 나는 아이들의 수호신이 돼 하늘에서 웃고 있겠지, 나의 엄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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