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옛날의 트로트- 노래의 고향을 찾아서

<28> 맘보와 탱고

(1) 김정애 <닐늬리 맘보>

‘맘보(Mambo)’는 1950년대 미국의 라틴재즈와 아프리카풍의 쿠바 리듬이 어우러져 생겨난 음악형식이다.

▲ 1950년대 우리나라에 댄스뮤직을 본격 도입하면서 김정애·도미를 발굴한 작곡가 나화랑 흉상(경북 김천 소재).

우리나라에는 전후 미국 팝 음악과 함께 흘러들어와 일대 광풍과도 같은 유행의 바람이 일었었다. 맘보춤과 다리통이 꽉 끼는 맘보바지도 함께 유행했다. 당시 대중음악평론가이자 작곡가로 활동하던 고 황문평씨는 “맘보는 노래의 만병통치약이다”라고 한마디로 일축해 뼈아픈 지적을 하기도 했다.

본명이 조광환인 나화랑의 작사·작곡으로 된 이 노래는 신민요풍의 가요에 라틴풍의 춤가락(이른바 맘보)을 접목시킨 노래인데, 1955년부터 국내에 상륙한 라틴음악 붐을 타고 유행의 바람몰이를 했던 맘보곡, 이를테면 <도라지 맘보>, <아리랑 맘보> 등등의 여러 노래 중 가장 크게 히트한 노래다. 경쾌하게 흘러가는 리듬 사이사이 딱! 딱! 박을 치는 소리가 듣는 이의 흥을 절로 돋운다.

 

         <닐늬리 맘보>

 1. 닐늬리야 닐늬리 닐늬리 맘보
   닐늬리야 닐늬리 닐늬리 맘보
   정다운 우리님 닐늬리 오시는 날에
   원수의 비바람 닐늬리 비바람 불어온다네
   님가신 곳을 알아야 알아야지
   나막신 우산 보내지 보내드리지
   닐늬리야 닐늬리 닐늬리 맘보
   닐늬리야 닐늬리 닐늬리 맘보

▲ 나화랑 댄스뮤직 앨범재킷

2. 춘삼월 봄바람 닐늬리 불어오며는
   나무가지마다 닐늬리 꽃잎은 떨어진다네
   우리님 언제 오시나 언제 오시나
   야속히 울려만 주네 울려만 주네
   닐늬리야 닐늬리 닐늬리 맘보
   닐늬리야 닐늬리 닐늬리 맘보
   닐늬리야 맘보~

                 (1957, 탁소연(나화랑)작사 / 나화랑 작곡)

 

▲ 김정애 앨범재킷

전화교환양에서 KBS 전속가수로…
이 노래를 부른 김정애(金貞愛, 1935 ~1987, 본명 김정순)는 강원도 출신으로 서울 상명여고를 졸업했다. 그녀의 가요계 데뷔는 너무도 뜻밖이고 이색적이라 할 수 있다.
1956년 KBS 노래자랑 프로그램이 대구공군비행장에서 공개방송으로 진행됐는데, 이때 첫 번째로 출연해 백설희의 노래 <아메리카 차이나타운>을 부른 게 김정애였다. 그녀의 노래를 듣고 난 심사위원장(당시 김창구 KBS 음악계장)이 그녀를 따로 불러 물었다.

“여기 대구공군비행장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나요?”
“전화교환양을 하고 있습니다.”
“노래를 잘 하던데… KBS 전속가수를 해보지 않겠어요?”
그녀의 가수인생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녀가 데뷔곡으로 내놓은 노래는 당시의 사회상이었던 ‘이촌향도’(농촌을 떠나 무작정 도시로 모여드는 현상)모습을 유머러스한 노랫말로 그린 흥겨운 스윙풍의 노래 <앵두나무 처녀>(1956, 천봉 작사/한복남 작곡)였다. 경쾌한 리듬을 타고 구르듯 낭랑하면서도 풋풋하게 흐르는 맑은 그녀의 목소리는 단숨에 가요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대히트였다.
그러나 그 복을 한껏 누리지 못하고 지병인 간경화에 시달리다 1987년 52세로 세상을 떴다.

 

(2) 도미 <비의 탱고>

탱고(Tango)는 1880년경 남미 아르헨티나의 보카라는 항구에서 탄생한 음악이다. 유럽계통의 춤곡과 아프리카계 원주민의 민속음악이 혼합된 것이라는 게 정설로 돼 있다.
우리나라에서 TV 시대가 열리면서 노래의 영역이 단순히 듣기만 하던 것에서 눈으로 보고 즐기는 시각의 기능이 더해졌다. 말하자면, 볼거리를 시청자들에게 만들어 줘야 하는 것인데, 그에 따라 가수의 인물도 중요한 비주얼 시대가 된 것이다.

▲ <청포도 사랑><비의 탱고>가 수록된 도미 앨범재킷

도미(都美, 1934~ )는 당대 미남미녀 가수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그의 도미란 예명도 ‘도시(都市)의 미남자(美男子)’에서 한 자씩 따서 조합해 만든 이름이다.
본명이 오종수인 도미는 경북 상주 출신으로 대구 계성고교를 졸업하고, 육사 입학 후 중퇴한 뒤 고대 영문과를 다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려서부터 가수 현인의 창법과 발성을 익혀온 그는 고교 때부터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다지던 참에 고교 2학년 때인 1951년, 대구에 있는 오리엔트레코드사가 주최한 제1회 전속가수 선발대회에 참가해 입상했다.

그는 곧바로 현인을 발굴했던 작곡가 박시춘을 찾아가 그 기량을 인정받고, 현인류의 노래 <신라의 북소리>를 데뷔곡으로 받는다. 1954년의 일이다.
그러나 반응은 그닥 신통치 않았다. 그리고 그 이태 뒤인 1956년, 그의 필생의 히트곡이 된 <청포도 사랑>과 현인이 불렀다 실패한 <비의 탱고>를 리바이벌곡으로 세상에 내놓으며 자신의 존재감을 제대로 세상에 알렸다.

 

            <비의 탱고>

 1. 비가 오도다 비가 오도다
   마지막 작별을 고하는 울음과 같이
   슬픔에 잠겨있는 슬픔의 가슴 안고서
   가만히 불러보는 사랑의 탱고

2. 지나간 날에 비오던 밤에
   그대와 마주서서 속삭인 창살가에는
   달콤한 꿈냄새가 애련히 스며드는데
   빗소리 조용하게 사랑의 탱고

                  (1956, 임동천 작사/ 나화랑 작곡)

 

선배가수 현인 노래 다시불러 인기
이 노래는 작곡가 나화랑이 군예대 종군시절, 막사에 앉아 쏟아져 내리는 비를 보며 떠올린 악상을 악보에 옮긴 것이라고 전해진다.
원래는 군예대가 상연한 악극 <비의 탱고> 주제가였던 것을 가수 현인이 따로 취입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가 도미의 목소리를 타고 비로소 빛을 보게 된 것이었다.
한참 뜰 때는 “비가 몇도게?” “비가 오도(5°)다!”라는 ‘아재개그’식의 넌센스 퀴즈가 유행하기도 했다.

그는 1950년대 말~1960년대 초까지 <하이킹의 노래>, <사랑의 메아리>, <청춘 브라보> 등 100여 곡의 노래를 부르며 건재를 과시했다. 그뒤 해병대 연예대장, 연예협회이사장(1970년대) 등 연예계 관련 단체일을 도모하다가 1984년 <도미 히트곡 총결산> 앨범을 신변정리하듯 내고 홀연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갔다. “도미(都美)가 도미(渡美)했다!”

 

▲ 당시 박인수 사건 신문보도와 법정에 선 박인수 모습

1950년 6.25전쟁 후 우리 사회는 이 땅에 주둔하기 시작한 미군부대를 통해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풍조(이른바 ‘양키문화’)가 밀물처럼 밀어닥쳐, 전통가족공동체 의식과 그에 따른 사회윤리가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그러면서 전에는 생전 듣도 보도 못했던 서구식 향락문화가 사회 곳곳에서 독버섯처럼 피어났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댄스, 즉 ‘춤바람’ 이었다.
이 춤바람은 단지 바람기 있는 남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소위 당시 우리사회 인텔리층이라는 여대생은 물론, 가정주부들까지 대낮에 장바구니를 들고 버젓이 카바레를 드나들고, 심지어는 집에 댄스선생을 초청해 교습을 받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여기저기 무허가 춤강습소와 비밀댄스홀도 생겨났다.

이 당시 그렇듯 일탈된 새 풍속도의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준 게 1955년 6월의 ‘박인수 사건’ 이었다. ‘한국판 카사노바’로 불리기도 한 박인수(당시 26세)는 현역 해군헌병대위를 사칭하고, 해군 장교 구락부와 국일관ᆞ낙원장 등의 사교장을 드나들며 능란한 춤솜씨로 상당수의 여대생과 가정주부, 직장여성 등 춤바람 난 여성 70여 명(실제는 100여 명이라 함)을 간통, 농락했다.

이때 박인수 사건의 1심 재판을 맡았던 고 권순영 판사의 무죄 판결문이 세상을 다시 한번 놀라게 했다. -“법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만을 보호한다.” 즉, 춤을 미끼로 한 혼인빙자간음죄(박인수 자신은 단 한 여성에게도 결혼하자는 말을 한 적 없고, 춤을 추고 나면 당연 코스처럼 여관으로 이어졌다고 진술했다)에 대해서는 무죄판결이 내려졌고, 2심에서 공무원을 사칭한 것 등이 유죄로 인정돼 1년6개월을 선고받고 수감됐다. 박인수는 복역하다 모범수로 감형돼 1년만에 풀려났다.

이 사건이 있은 이후, 대학가에는 “E여대는 박인수의 처가”라는 말이 유행처럼 떠돌았고, 세간에는 “사모님, 제비 한 마리 키우시죠!”란 말이 우스갯소리로 나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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