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옛날의 트로트- 노래의 고향을 찾아서

<27> 블루스·탱고, 그리고 맘보·부기우기

▲ <대전부루스>노래비. 1999~2017년 대전역 서부광장에 세워져 있었으나, 원곡가수 안정애가 리바이벌 가수 조용필의 이름을 노래비에 함께 올려줄 것을 강하게 주장해 가수이름 없는 노래비 상태로 철거됐다.

 

(1) 박신자 <땐사의 순정(純情)>

1945년의 8.15해방과 분단, 그리고 1950년 6.25전쟁 등 복잡한 사회상황의 변화 속에서 댄스홀과 댄스학원들이 늘어났고, 우리의 대중가요도 당시 미국인들이 좋아하던 춤곡 명칭을 붙인 노래들이 크게 유행했다. <대전부루스>, <비의 탱고>, <나포리 맘보>, <닐늬리 맘보>, <기타부기> 등의 노래들이 그때의 대표적인 인기곡들이다.
그와같은 사회분위기 속에서 춤을 추는 ‘댄서’는 새로운 도시여성 직업의 하나로 떠올랐고, 그들의 애환을 당시 유행하던 3분박자의 블루스 리듬으로 노래한 것이 박신자(朴信子, 1931~1961)의 <땐사의 순정(純情)>(1959) 이다.

 

             

▲ 박신자의 <땐사의 순정> 앨범 재킷

<땐사의 순정(純情)>

1.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
   처음 본 남자품에 얼싸안겨
   네온싸인 아래 오색등(五色燈)불 아래
   춤추는 땐사의 순정(純情)
   그대는 몰라 그대는 몰라 울어라 색소폰아

2. 새빨간 드레스 걸쳐입고
   넘치는 그라스에 눈물지며
   비 나리는 밤도 눈 나리는 밤도
   춤추는 땐사의 순정(純情
   그대는 몰라 그대는 몰라 울어라 색소폰아

3. 별빛도 달빛도 잠든 밤에
   외로히 들창가에 기대서서
   슬픈 추억 속에 남 모르게 우는
   애달픈 땐사의 순정(純情)
   그대는 몰라 그대는 몰라 울어라 색소폰아

                         (1959, 김영일 작사 / 김부해 작곡)


‘퇴폐적’ 이유로 두번 금지곡 판정
1959년에 유성기 음반으로 나온 이 노래는, 노래도 노래지만 노래를 부른 가수 박신자의 화사한 외모가 가요팬들의 가슴을 흔들었다.(가수 주현미의 큰어머니로 알려져 있으나,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다)

짙고 긴 눈썹에 갸름한 흰얼굴이 상냥하고 부드러운 인상을 풍기는데다가, 블루스 리듬에 맞춰 흐느적거리며 끈적하게 부르는 노래가 빼어난 가창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고혹적인 느낌을 갖게 해 특히 남성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 <댄서의 순정>과 <대전부루스>를 리메이크해 히트시킨 김추자

그러나 서른 살에 세상을 떠나 숱한 궁금증과 함께 아쉬움을 남겼다. 그런데다가 이 노래가 ‘가사가 저속하고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1968년 공연윤리위원회로부터 금지곡 판정을 받는 불운을 안기도 했다.

6년 뒤인 1974년, 김추자가 뛰어난 가창력으로 곡의 분위기를 한껏 띄워올리며 인기를 얻기도 했으나, 그 한 해 뒤에 또다시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묶이기도 해, 원곡가수의 요절 등 얽힌 사연만큼이나 듣는 이들의 가슴을 아리게 하는 순정어린 노래다.

 

 

(2) 안정애의 <대전부루스>

                <대전부루스>

1.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떠나가는 새벽열차 대전발 영시오십분
   세상은 잠이 들어 고요한 이밤
   나만이 소리치며 울 줄이야
   아~붙잡아도 뿌리치는 목포행 완행열차

2. 기적소리 슬피우는 눈물의 플랫트홈
   무정하게 떠나가는 대전발 영시 오십분
   영원히 변치말자 맹서했건만
   눈물로 헤어지는 쓰라린 심정
   아~ 부슬비에 젖어가는 목포행 완행열차

                              (1956, 최치수 작사 / 김부해 작곡)


 

▲ 안정애의 <대전부루스> 앨범 재킷과 영화<대전발 0시 50분> 포스터

50년대 ‘~블루스’ 노래 중 최대 히트곡
1950년대에 불린 기왕의 ‘~블루스’ 노래들 중 최대의 히트작은 단연 안정애(安貞愛, 1936~ )의 <대전부루스>다.
비록 정통 블루스라기 보다는 일본풍의 ‘트로트 블루스’로 보는 게 옳을 이 한 곡의 대히트로 안정애라는 가수는 ‘블루스의 여왕’이라는 자신의 이미지를 굳건하게 지켜왔다.

본명이 안순애로 경남 하동이 고향인 안정애는, <타향살이>의 가수 고복수가 운영하던 동화예술학원에서 가수가 되기 위한 노래공부를 하다 작곡가 김부해에게 픽업돼 <밤비의 부루스>라는 데뷔곡을 내면서 가수의 길에 들어섰다.

<대전부루스>는, 이 노래를 부른 가수도 가수지만 노랫말을 지은 최치수의 작사에 얽힌 일화가 화제가 되면서 뭇팬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열차 승무원>레코드사 영업부장> 아세아레코드 대표’의 이력을 가진 작사가 최치수가 레코드사 영업사원 시절 출장 중 대전역에서 목포행 완행열차의 차창 밖과 차 안에서 서로의 작별을 아쉬워 하는 두 연인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고, 이를 노랫말로 스케치 해 작곡가 김부해에게 보낸 것이 공전의 히트를 하게 된 것이다.

4박자 단조트로트의 전형인 <대전부루스>는 1963년 최무룡·엄앵란·신성일 주연의 영화 <대전발 0시 50분>을 낳으며 그 주제가로서도 팬들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다.

▲ 조용필의 1집 앨범 재킷

게다가 1980년 대마초에 연루돼 활동을 잠시 접었던 조용필이 <창밖의 여자>,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같이 자신의 앨범(제1집)에 리메이크 해 수록한 것이 예상 밖의 히트를 하면서 꺼져가던 불씨에 다시 불을 붙였다.

조용필의 탁하면서도 쉰듯한 목소리가 이끌어 가는 <대전부루스>는 원곡 여가수 안정애의 분위기와는 또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며, 20년의 터울이 진 젊은 가요팬들을 그 감흥에 동승시켰다.

그 옛날 상·하행선 완행열차가 어두운 밤공기를 가르고 허위적거리며 대전역에 들어서면, 후다닥 뛰어내려 3분 정차시간 동안에 후루룩~그릇을 비워내던 ‘가락국수’의 맛과 그 스릴을 잊지 못하는 이들은 아직도 <대전부루스>의 블루스 가락을 손가락으로 나직이 더듬어 가며 회상에 젖는다.
“아~붙잡아도 뿌리치는 목포행 완행열차~”

 

미국의 대중음악이 흡사 점령군처럼 본격적으로 이 땅에 들어온 것은 1945년 8.15 해방 후다. 그리고 195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슬로우 슬로우 퀵 퀵~”하며 낯선 남녀가 서로 부둥켜 안고 춤을 추는, 이른바 사교춤을 추지 못하면 이제 도래한 자유주의 시대의 유행에 뒤떨어진다는 인식이 특히 인텔리층에 가득찼다.

당시 외국인 전용 댄스홀 외에는 한국인이 드나들 수 있는 댄스홀이 하나도 없어 “서울에 댄스홀을 허(許)하라!”는 공개청원이 잡지를 통해 올라오기도 했다.
바로 이 시대의 ‘춤바람’을 소재로 시대상을 반영한 대표소설로 꼽혔던 것이 정비석(鄭飛石, 1911~1991)의 《자유부인(自由夫人)》(1954) 이었다.

《자유부인》은 1954년 1월1일 부터 8월6일까지 총 215회에 걸쳐 <서울신문>에 연재됐던 인기 장편소설이다.
사교춤에 빠진 대학교수 부인의 불륜과 일탈을 그려 다섯 번의 필화(筆禍: 발표한 글이 법률상 또는 사회적으로 말썽을 일으켜 제재를 받는 일)를 겪었다.

서울대 법대 황산덕 교수가 서울대의 <대학신문> 지상에 ‘《자유부인》 작가에게 드리는 글’(1954. 3.1)을 실었다. 이 글에서 황 교수는 “대학교수를 양공주(洋公主) 앞에 굴복시키고, 대학교수 부인을 대학생의 희생물로 삼으려고 하고 있다”며 이 소설의 연재 중단을 요구한 것이 첫 번째 필화사건이다.

그런가 하면 다섯 번째 필화는 1956년 한형모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영화 속 ‘키스장면’이 말썽을 일으킨 웃지못할 사건이었다.
아무튼 《자유부인》은 우여곡절 끝에 연재가 끝나고 정음사 출판사에서 단행본 책으로 묶여져 나왔는데, 당시 무려 7만 부가 넘게 팔려 우리나라 단행본 출판사상 첫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반면에 연재가 끝나자 <서울신문> 판매부수가 5만2000부 가량 단번에 떨어져 나가 그 인기를 실감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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