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광희 칼럼 - 누리백경(百景)(160)

# 삼성그룹 창업자인 이병철 회장(1910~1987)이 43년 전인 1977년 8월, 일본의 <닛케이 비즈니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후계구상을 밝혔다.
“삼성이 작은 규모의 기업이라면 위에서부터 순서를 따져 경영을 장남이 맡으면 되겠지만, 삼성그룹 정도의 규모가 되면 역시 경영능력이 없으면 안된다. 장남(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 2015년 별세)은 성격상 기업경영이 맞지 않기 때문에 기업에서 손을 떼게 해야 한다.

차남(이창희, 전 새한그룹 회장, 1991년 별세)은 중소기업 정도의 사고방식 밖에 없기 때문에 삼성그룹을 맡길 수 없다. 그래서 아들 셋 가운데 막내(이건희 회장)를 후계자로 결정했다.”
이건희 당시 중앙매스컴(중앙일보·동양방송)이사를 사실상 후계자로 대내외에 천명한 셈이었다.

# 이 인터뷰가 있고나서 10년 뒤인 1987년 11월19일 이병철 창업주가 세상을 떠나자, 장례를 치르고 난 뒤 곧바로 이건희 당시 부회장이 회장에 취임했다.
이때 이건희 회장의 나이 45세였다.

그는 훗날 자신의 에세이집 《생각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서 “회장에 취임하고나니 막막하기만 했다. 삼성 내부는 긴장감이 없고, 내가 제일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1992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불면증에 시달렸다.”며 취임 당시의 고뇌를 털어놓기도 했다.

그는 1942년 대구에서 출생해 부모가 바쁜 이유로 여섯 살 때까지 경남 의령의 할머니집에 맡겨져 자랐다. 고등학교(서울사대부고 13회) 동기생인 홍사덕 전 의원(지난 6월 별세)은 이 회장에 대해 “말수는 적었지만, 승부를 두려워 하거나 피하지 않는 ‘싸움닭’ 기질을 갖고 있었다.”고 생전에 회고했다.
학교시절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생활을 한 적이 있는 이 회장은 “스포츠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또하나의 교훈은, 그 어떤 승리에도 결코 우연이 없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 그는 삼성을 오로지 ‘초일류 기업’으로 만들겠다는 집념과 뚝심을 가지고 ‘2류 근성 척결’에 온 힘을 쏟아 반도체·스마트폰 신화를 일궈냈다.
취임 당시 9조9000억에 불과하던 그룹 전체매출을 2018년 약 387조로 끌어올려 39배 증가시켰으며, 영업이익도 259배 증가시키고, 삼성의 글로벌 브랜드 가치를 총 623억 달러(약 71조)로 키우면서 세계 5위로 도약시켰다.

그가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사장단회의에서 한 말- “결국 내가 변해야 한다. 바꾸려면 철저히 바꿔야 한다. 극단적으로 얘기해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야 한다”는 세칭 ‘신경영 선언’은 지금까지도 세간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금언이 돼 있다.

뿐이랴. 25년 전인 1995년 중국 베이징 사장단 회의 뒤 특파원과 가진 간담회에서 “우리나라의 정치는 4류, 관료와 행정조직은 3류, 기업은 2류다”라고 한 뼈있는 말은 아직도 이땅에서 양심을 가지고 기업하는 이들의 가슴을 친다. 그가 ‘초일류’로 일궈놓은 ‘명품’ 삼성은 이런 풍토 속에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그렇게 삼성신화를 창조해 온 그가 2014년 5월 자택에서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투병 6년5개월 만에 향년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저작권자 © 농촌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