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 - 씨맥스이앤씨 우형동 대표

외국영화수입배급과 미디어콘텐츠유통의 씨맥스이앤씨 우형동 대표는 대우그룹 재직 시 대우의 영화전문케이블방송인 DCN(현 OCN)을 개국해 낸 숨은 주역이었다.
우 대표로부터 DCN개국의 비화와 함께 퇴직 후 기업운영에 관한 얘기를 들어봤다.

 

국내외 영화 수입해 안방극장시대 열어
영화채널 OCN 전신인 DCN 개국 주도
대형부동산 중개업으로 인생 2막 삶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골라보는 시대
먼저 오늘날 집에서 영화를 보는 홈시네마가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를 알아봤다.
“과거에는 영화를 극장에서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TV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극장 외에도 집에서 영화를 볼 수 있게 됐습니다. 1980년대 초반에는 VTR 개발로 비디오테이프로 영화를 보게 되면서 전국적으로 비디오테이프 대여점 4만 개가 성업하며 홈비디오시대를 열었습니다.
1993년 정부는 뉴미디어시대를 열고자 영화, 음악, 스포츠 등 29개 장르별 전문 케이블방송국을 개국시켰습니다. 이로써 시청자들은 하루 종일 집에서 케이블방송을 통해 영화를 볼 수 있게 됐습니다. 최근에는 인터넷기술이 TV와 스마트폰에 접목돼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스스로 골라서 보는 시대가 됐습니다.”

DCN 케이블방송 시청률 1위 이끌어
1970년대 비디오테이프를 우편으로 배달하는 구멍가게 형태로 시작한 미국의 HBO사는 15년간 많은 아이디어로 지금의 인터넷TV 개발을 선도하는 최고의 영화채널이 됐다. 한편, 미국의 넷플릭스사는 OTT(OVER THE TOP)서비스를 개발해 유료시청 회원 1억 명 이상을 확보하며 연 18조 원의 수익을 얻고 있다.

우 대표로부터 영화전문채널 개국에 얽힌 얘기를 들어봤다.
“1984년 대우그룹에 공채로 입사해 1989년 영국에 있는 대우전자 VTR 생산 공장에서 근무했습니다. 당시 영국에는 이미 골프, 축구, 영화 등을 볼 수 있는 위성방송이 개국돼 있었죠. 이를 보면서 한국에도 위성방송시대가 곧 올 것이라고 예측하고 퀸즈대학에서 1년간 영화방송과 관련된 공부를 했습니다. 영국 근무 3년째가 되던 해 본사로 돌아와 해외로부터 외화를 수입하는 일을 하게 됐어요.
1993년 어느 날, 공보처(현 문화체육관광부)가 케이블채널에 참여할 방송운영사를 모은다는 신문광고를 봤어요. 영국 근무 중 봤던 장르별 전문방송을 떠올리며 홈비디오사업 수행 중 체험한 영화 판권사업의 노하우를 접목해 국내외 영화를 모아 잘 편성하면 방송운영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지요. 광고가 나고 두 달 뒤에 전무님을 모시고 칸영화제를 보러가는 비행기 안에서 정부의 케이블방송 공모에 참여해 보겠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흔쾌히 허락해 주셨습니다. 귀국해 사업아이디어를 담은 기안서를 작성해 배순훈 사장을 거쳐 김우중 회장에게 보고를 드렸더니 즉각 결재를 해줬습니다.

사업제안서 제출 마감시한이 두 달밖에 남지 않아 시간이 촉박했습니다. 나는 콘텐츠, 편성운영 등 사업전략을 짜고 장비, 시설 등은 각 부문 전문실무자를 각각 배치하며 일을 몰아붙였어요. 재정과 회계는 대우 주거래 회계법인의 지원을 받는 것으로 해 5권 분량의 ‘케이블방송 영화전문채널 운영 사업제안서’를 만들어 마감에 맞춰 제출했지요. 자료를 만드느라 두 달간 하루에 잠을 3~4시간밖에 못 잤어요. 제안서를 제출하고 집에 돌아와 잠을 잤는데 깨고 보니 다음날 오후이더라고요. 22시간을 잔 거죠.

8월에 공보처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했고 영화전문채널인 DCN이란 이름의 케이블방송 운영사업자에 선정됐습니다. 허가취득에 임박해서야 삼성도 ‘캐치온’이란 이름의 영화전문채널을  개설하려는 것을 알았어요.”

좋은 영화 찾아 국내외 발품
삼성은 수년 전 케이블방송 개국 정보를 입수하고 사전에 준비를 해왔다. 이에 우형동 대표는 1년 뒤 방송 출범에 대비해 삼성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고 방송시설과 인력, 교육팀 구성을 마치고 곧바로 좋은 영화 판권 확보에 나섰다.
“전 좋은 영화를 확보하고자 미국의 메이저영화사인 MGM, 컬럼비아, 유니버설, 파라마운트, 21세기폭스, 디즈니 등을 직접 방문해 영화를 달라고 졸랐습니다.”

우 대표는 미국 영화사당 30분 면담의 강행군을 통해 1000여 편의 미국영화를 모았고, 국내에서도 각 영화사를 다니며 한국영화 500여 편을 모았다. 우 대표는 DCN 개국 시, 삼성의 ‘캐치온’과 차별화를 하기 위해 아카데미영화제 실황중계권을 사들여 개국 잔치를 빛냈다.
우 대표는 DCN 개국 후에도 신작 영화를 모으고자 매년 세계 도처를 분주히 돌았다. 이런 활동에 힘입어 DCN은 삼성 캐치온을 누르고 시청률 1위로 앞서갔다. 한편, 우 대표는 정주호 부사장과 영화사업 확장의 일환으로 서울 강남에 시네하우스와 메가박스도 개장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대우그룹이 해체되면서 동양그룹으로 넘어가 DCN이 OCN으로 바뀌고 말았다.

대우 파산 뒤 모든 게 바뀌다
1998년 대우를 떠난 우 대표는 한때 영화 수입과 방송제작을 하는 씨맥스커뮤니케이션즈를 운영했고, 지금은 씨맥스이엔씨의 대표로 있으면서 영화를 수입해 국내 극장에 배급하고 남은 건 홈비디오로 골라보는 VOD필름의 판권을 KT 자회사에 내주고 매달 수익을 얻는다고 한다.

우 대표는 10여 년 전에는 건국대에서 부동산 관련 공부를 1년 한 뒤 서울 강서구와 마포구의 좋은 택지를 구입해 빌라를 지어 팔기도 했다. 요즘엔 공인중개사 자격을 취득하고 대형건물 매매 중개업을 한다고 한다.
“내가 영화와 부동산사업에 눈을 뜨게 된 건 대우라는 대기업에서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신의를 중시해 국내외 많은 사람과 교분을 맺고 있습니다. 이를 큰 자산으로 삼아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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