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자수필 - 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물안개는 풀잎마다
영롱한 이슬을 매달아
발등을 촉촉하게 적신다"

새벽 5시를 넘겨 현관문을 나서면 밖은 아직 검은 밤이다. 하늘엔 찬 별이 총총하고 오리털 누빈 점퍼에 머플러를 목에 칭칭 감아도 으스스하다. ‘찰칵’ 손전등을 켜서 권총처럼 어둠에 들이대면 발밑에 잠에서 덜 깬 길이 비틀비틀 걸어간다. 방안 따스한 이불 속에서 잘 익은 고구마처럼 말랑하던 손이 자동차 차디찬 핸들에 붙들려 한기가 어깻죽지 속살 깊이까지 파고든다. 전조등 불빛 줄기에 허름한 연무가 빛을 산란시켜 길이 흐려져 더듬더듬 길을 헤매며 새벽예배로 나아간다. “손 시려, 장갑 껴야겠어...”  손을 마주 비빈다.

텅 빈 교회 안에 군데군데 몇 사람이 먼저 와 있다. 우리 부부는 거리를 두고 늘 앉던 자리에 앉는다. 나는 말없이 기도를 시작한다.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당신 앞으로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이 나를 읽는 새벽, 내 영혼도 촉수를 높여 당신을 찾습니다. 아버지 당신께 내가 연결될 때 견줄 데 없는 기쁨을 누립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알기에 당신 앞에서  저는 남루하고 비속한 자신을 감출 수 없는 욕심 많은 어린 아이입니다. 내일도 다시 이 자리에 나오게 초대주세요. 눈물밖에 드릴 것이 없는 저를 용서해주시고, 드릴 것이 있는 자로 바꿔 주십시오. 나의 피난처 되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6시를 넘겨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안개가 더 짙어진다. 목도강을 건너올 땐 물안개가 피어올라 모든 경계가 허물어진다. 앞산도, 배밭도 모두 사라지고 새소리도, 바람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적막함만 고여 있다.
/안개속을 헤매면 이상하여라/ 숲 돌 나무 저마다 외로움에 잠기고/ 모두가 다 혼자다.//
헤르만 헤세의 시처럼 안개가 어슬렁거리며 아침 산책을 한다. 꿈결 같은 안개의 유희. 짧은 시간 동안 계속 바뀌는 풍경. 나도 안개에 끌려 뒷마당으로 나선다. 물안개는 풀잎마다 영롱한 이슬을 매달아 발등을 촉촉하게 적시고, 서리가 왔나 어느새 호박잎은 축 늘어졌다. 서리에도 씩씩한 참나물은 잎이 청청하고 표고버섯은 착하게도 음전히 피어올랐다. 김장배추도 한창 몸통을 부풀리고 처음 심은 돌산갓이 잘 자라 서리에도 끄떡없다. 

아침 해가 안개를 뚫고 솟아오르면 낮게 드리웠던 안개가 조금씩 산란을 하며 복숭아빛 아침으로 물든다.
배밭 끝에서 들깨를 베는 남편에게 소리친다. “차, 한 잔 하실래요?” 시누이가 주신 수삼을 구증구포해서 거의 나흘을 은근하게 다린 홍삼차가 끓고 있다. “그래 올라 가” 메아리 같은 남편이다. 요즘같이 쌀쌀함이 코끝을 스칠 때 아침 안개를 보며 마시는 차 한 잔은 멋스럽다. 잔을 통해 오는 따스함, 코끝을 맴도는 인삼향, 쌉싸름한 맛이 풍미를 더한다.

가을을 마시고 누이의 사랑을 마신다. 정호승 시인의 ‘지푸라기’가 생각난다.
/나는 길가에 버려져 있는 게 아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다시 일어서기 바라는 사람 위해서다./ 먼지를 일으키며 바람 따라 떠도는 게 아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당신을/ 오직 기다릴 뿐이다.// 내일도 슬퍼하고 오늘도 슬퍼하는/ 인생은 언제 어디서나 다시 시작할 수 없다고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당신이 지푸라기라도 다시 잡고 일어서길/ 기다릴 뿐이다.// 물과 바람과 맑은 햇살과/ 새소리가 섞인 진흙이 되어/ 허물어진 당신의 집을 다시 짓는/ 단단한 흙벽돌이 되길 바랄 뿐이다.//
지푸라기의 그 갸륵하고 애틋한 사랑이 가슴 울리는 가을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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