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옛날의 트로트 - 노래의 고향을 찾아서

<25> 남인수의‘3대 소야곡’(애수·추억·이별)

▲ 노래 부르는 남인수 동상(경남 진주 진양호반가 소재)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미성의 가수’…전통가요의 새 판을 열어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을 부르며 자랐습니다 / <울며 헤진 부산항>을 부르며 자랐습니다 / ‘이 강산 낙화유수…’를 부르고 / <서귀포 칠십리>를 부르며 자랐습니다 / 해방 뒤/ ‘달도 하나 해도 하나 사람도 하나’를 불렀습니다 / 아 <가거라 삼팔선>을 부르며 분단을 알았습니다 // 임시수도 부산을 떠나며 / <이별의 부산정거장>을 부르며 / 휴전 뒤의 삶을 살았습니다 // 리라꽃도 피었습니다 / 쌍고동도 울었습니다 / 산유화도 피고 졌습니다// 식민지 말기 일제 찬양의 노래도 불렀습니다 //기생들 몰려들었습니다 / 폐결핵을 앓았습니다 /본명 최문수 / 강씨 문중에 입적 강문수가 되었습니다 / 18세 이후 / 그는 반도의 목소리였습니다 / 해맑은 색깔 / 넓은 음역 / 그리고 간드러진 굽이굽이 / 그의 나비넥타이는 퍼덕여 곧장 나비로 날아올랐습니다”

                                  (고은 시 <만인보>20-3, ‘남인수’ 전문)

 

‘반도의 목소리’,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미성의 가수’라는 남인수(南仁樹, 1918~1 962). 그는 고난과 역경으로 점철된 우리 시대의 결을 따라 굴곡진 불우한 청년 시절을 살았다. 술집 주모였던 어머니의 개가에 따라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본명 최창수(崔昌洙)에서 강문수(姜文秀)의 삶을 살았다.

진주고보 중퇴 후, 가난과 의붓아버지의 구박을 떨치고 무단가출해 가수가 되겠노라고 진주에서 작정 상경한 것이 그의 나이 열일곱 살 때인 1935년이다.
당시 시에라레코드사의 문을 두드렸던 것인데, 그때 문예부장이었던 작사가 박영호가 그를 작곡가 박시춘에게 소개했다.

이렇게 해서 그 이듬해인 1936년 데뷔곡으로 세상에 내놓은 노래가 <눈물의 해협>이었고, 그 이태 뒤인 1938년 이부풍이 노랫말을 바꿔 다시 내놓은 곡이 남인수의 대표곡이 된 <애수의 소야곡>이다. 남인수란 예명은 데뷔곡을 내놓을 때 작사가 강사랑이 지어줬다.

 

▲ <애수의 소야곡> 노래비(과거 드림랜드였던 북서울 꿈의 숲 공원 소재)

        <애수의 소야곡>

1.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요만은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
   고요히 창을 열고 별빛을 보면
   그 누가 불어주나 휘파람 소리

2. 차라리 잊으리라 맹서 하건만
   못잊을 미련인가 생각하는 밤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감으면
   애타는 숨결마져 싸늘하고나

3. 무엇이 사랑이고 청춘이든고
   모두가 흘러가면 덧없건만은
   외로운 별을 안고 밤을 새우면
   바람도 문풍지에 싸늘하고나

         (1938, 박노홍(이부풍) 작사 /박시춘 작곡)

 

오로지 이 곡의 작곡자 박시춘의 단조로운 기타연주가 반주의 다인 <애수의 소야곡>은, 남인수의 음악성을 벌거벗긴 채로 유감없이 다 보여준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윤기가 나는 단단한 미려한 음성, 폭넓은 음역과 거침없는 고음처리, 정확한 발음과 가사전달… 등의 가창력은 단연 뛰어난 남인수만의 능력이었다. 게다가 수려한 외모까지… 스타의 면모를 고루 갖췄다.

남인수의 혜성 같은 등장으로 이전의 스타들-채규엽·고복수 시대가 저물고, 우리 가요계에 새 판도가 열렸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된 그의 시대는, 그가 마흔세 살로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건재했다.

작곡가 백영호, 남인수와의 인연
<애수의 소야곡> 이후, <감격시대>, <낙화유수>, <가거라 삼팔선>, <달도 하나 해도 하나>, <서귀포 칠십리>, <이별의 부산정거장>, <청춘고백>, <산유화>, <무너진 사랑탑> 등의 불후의 히트곡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조선반도를 울렸다.

▲ <애수의 소야곡>작곡가 박시춘(왼쪽)과 <추억의 소야곡>, <이별의 소야곡> 작곡가 백영호

그러는 사이에 부산 출신 작곡가로 훗날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로 성가를 올린 백영호가 짐짓 “우리가 남이가?” 하며 동향의식을 내세우며 투병 중인 남인수를 직접 찾아가 건네준 곡이 두 번째, 세 번째 남인수의 소야곡이 된 <추억의 소야곡>과 <이별의 소야곡>이다.

 

            <추억의 소야곡>

1. 다시한번 그 얼굴이 보고싶어라
   몸부림 치며 울며 떠난 사람아
   저 달이 밝혀주는 이 창가에서
   이 밤도 너를 찾는 이 밤도 너를 찾는
   노래 부른다
2. 바람결에 너의 소식 전해들으며
   행복을 비는 마음 애달프구나
   불러도 대답없는 흘러간 사랑
   차라리 잊으리라 차라리 잊으리라
   맹서 슬프다

                      (1956, 한산도 작사/ 백영호 작곡)

 

            <이별의 소야곡>

1. 아,웬말이냐 이별이 웬말이냐
   정들대로 정든 지금 이별이 웬말이냐
   헤어질 운명인줄 몰랐던 탓에
   내 마음 송두리채 내 마음 송두리채
   바친 것이 원수다

2. 아,꿈이었네 야속한 꿈이었네
   행복하게 살자하던 맹서는 꿈이었네
   나 혼자 버려두고 떠나간 님아
   차라리 내 신세가 차라리 내 신세가
   가엾기만 하구나

                        (1956, 한산도 작사/ 백영호 작곡)

 

▲ 극단 공연을 마친 후의 남인수(뒷줄 맨 왼쪽)와 이난영(앞줄 오른쪽 앉은 이. 왼쪽은 배우 김지미, 1958년)

천하의 남인수 발목 잡은 폐결핵
그러나, ‘세기의 미성가수’로 잘 나가던 그의 발목을 잡아챈 건 폐결핵이었다. 전쟁을 전후해 피폐한 환경 속에서 온 나라 안에 만연한 이 병을 피해 가지 못하고 8.15해방 직전부터 앓기 시작한 이 고질병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남인수는 만약에 느닷없이 올 수 있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억척스레 돈 관리를 했고, 그런 영문도 모르는 주변 사람들은 그를 돈에 인색한 ‘돈인수’라는 별명까지 지어 붙였다.결국 그런 노력도 허사로 돌아가고, 결국 그는 폐결핵으로 세상을 하직하게 된다.

<애수의 소야곡>으로 남인수가 톱스타의 자리에 올라 무려 20여 년간을 거의 독주하다시피 하며 자신의 아성을 쌓아가다 안타깝게 이른 나이에 타계하자, 그의 노래를 흉내 내며 따라부르는, 이른바 모창가수가 우후죽순처럼 무수히 생겨났던 것도 특기할 만한 현상이었다.
그는 말년에 무용가였던 부인(김은하)과의 이혼도 불사하고, 열여섯 살 때부터 짝사랑하며 가슴앓이를 하던 <목포의 눈물>을 부른 가수 이난영과 동거를 했다.

이난영 또한 남편 김해송이 6.25때 월북하다 죽은 마당이어서 함께 살을 나누며 지극정성으로 남인수의 병간호를 했다. 그러나 그도 허사, 남인수는 연인 이난영의 무릎을 베고 이난영이 나직이 불러주는 <애수의 소야곡>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훗날 이난영은 울면서 말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인수가 나를 진정한 여자로 만들어 줬다!”

이때까지 그가 이 세상에 남겨놓은 노래는, 해방 전 800여 곡, 해방 후 200여 곡 등 모두 1000여 곡에 이른다. 지금도 경남 진주 진양호반가에 가면, 서서 노래하는 그의 모습을 만나 볼 수 있다.

 

▲ ‘세레나데’를 연인의 집 창가에서 부르는 오페레타의 한 장면.

“창문을 열어다오, 내 사랑 그대여~”하고 밤에 사랑하는 연인의 집 창가에서 부르거나, 연주하던 사랑의 노래, 혹은 집 밖에서 치르던 파티를 위한 가벼운 연주곡을 말한다. 나중에 연주회용 악곡, 가곡이 됐는데, 슈베르트·하이든의 세레나데와 특히 마리오 란자(Mario Lanza)가 부른 토셀리(Toselli)의 세레나데, 모차르트의 <밤의 세레나데(아이네 클라이네 나하트 무직크-Eine Kleine Nacht Musik)> 13번이 유명하다.

한자어로는 ‘소야곡(小夜曲)’이라 한다.
남인수의 ‘3대 소야곡’(애수·추억·이별)은 말 그대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그리워하는 추억의 노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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