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자수필 - 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고구마줄거리를 삶으면
숨이 죽어 부드러워지듯
고통을 겪은 친구는
예전과 달리 따뜻해졌다"

가을이 몰려온다. 구름 한 점 없이 쏟아지는 햇살에 눈부신 황금 벼이삭은 바다로 출렁이고, 비탈진 밭 땅에도 알찬 콩알이 익고, 둑에 일렬로 선 들깻잎도 노랗게 낙엽이 든다. 들판엔 김장배추며, 무, 대파가 칸칸이 들어차고, 늦사과는 불그스레 흥이 일고, 잎이 다 떨어진 감나무에 감이 등불처럼 매달렸다. 우리 배나무는 아직 단풍이 들진 않았지만 조락한 이파리가 길가를 따라 뒹굴고 마당 귀퉁이에 엉겨붙어 있는 세 그루 다래나무에 층층이 겹쳐진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떨어진 자잘한 햇발이 금싸라기같이 바글바글하다.

코로나19 때문인지 올해는 왠지 추위가 빨리 올 것 같고, 최근 채소가격이 무척 올라서 우리도 자급자족을 해볼 생각으로 고추, 고구마, 들깨, 무, 배추를 용감하게 심었다. 요즘 남편은 들깨를 베어 날라다가 털기 시작했고, 한 뼘 남짓한 고구마밭만 정리하면 김장거리만 남는다.
대여섯 고랑의 고구마 줄기가 밭을 넘쳐나 며칠 저녁 작업을 했는데도 아직 남았다. 밀레의 그림 ‘만종’처럼 어스름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집으로 들어와 저녁을 먹고, 우리가 애청하는 TV 프로 ‘전원일기’를 보며 껍질을 벗긴다.

고구마줄기를 하루라도 그냥 두면 껍질이 잘 벗겨지지 않아 당일에 까서 바로 삶아야 해서 길어진 밤 시간을 잘 활용하는 일이다. 남편이 나보다 속도가 빨라 남은 것을 맡기고 나는 깐 줄기를 먼저 삶는다. 생고구마 줄기를 끓는 물에 넣을 때 줄기는 제 성질대로 뻗쳐서 마구 부러지고 냄비 밖으로 튀어나와 손으로 눌러가며 꽉 차게 넣고 뚜껑을 덮지만 뚜껑이 번쩍 들리기 일쑤다. 그렇게 성질이 뻣뻣한 것도 잠깐 끓는 소금물에 한 번 삶고 나면 그 양이 반으로 확 줄고 촉감도 보드레해진다. 그렇게 휴지처럼 부드러워지는 걸 보니 갑자기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함께 교회를 다니던 친구 남편이 소천했다는 부고가 날아왔다. 남편 고향이 괴산이라 여기로 내려왔다던 친구는 매우 똑똑하고 사리에 밝고 자기관리가 잘 되는 사람이어서 얼핏 보면 까다롭고 가까이 사귀기에도 어려웠다. 친구 남편은 내려올 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고, 그녀의 남편 역시 자존심이 세고 자기주장이 분명했다. 어쩌다 목사님이 심방을 갈 때도 자리를 피했고 집집이 돌아가며 예배를 드릴 때에도 항상 없었다.

남편의 병간호에 극진했던 아내의 간절한 기도도 소용이 없었다. 이곳에 내려와 10년을 지내면서 심장병, 당뇨에 신부전증 등의 합병증을 앓으며 일 년에 절반 이상을 병원에서 지냈다. 
부고를 받고 바로 장례식장을 찾았다. 코로나19로 썰렁한 분위기다. 분향을 마치고 돌아서니 친구는 두 손을 부여잡고 그렁그렁한 눈물을 쏟아냈다. 우리에게 원치 않은 고통이 찾아왔을 때 ‘왜?’ ‘언제까지냐’고 묻지만 우리가 끝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친구는 남편이 낫기를 기도하기보다는 그 고통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며 하루하루를 함께 살아가기를 기도했다고 한다. “누구나 자기 앞에 자기 몫으로 닥치면 다하지 않겠어요~” 겸손하게 말한다.

고구마줄거리를 뜨거운 물에 삶으면 숨이 죽어 부드러워지듯이 고통을 겪은 후 친구의 태도는 예전과는 너무 다르게 부드럽고 따뜻해졌다. 한층 더 성숙해지고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친구의 말 속에 누군가의 피난처가 돼줄 수 있는 넉넉함이 느껴지고 그 친구가 정말 크게 보였다. 돌아오는 길 차창을 열고 달려 머리채를 잡아채는 가을바람에 한결 속이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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