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옛날의 트로트 - 노래의 고향을 찾아서

<23> 옛 왕조의 숨결을 찾아서 (1) <황성 옛터>

▲ <황성 옛터> 노래비. 작사가 왕평의 고향인 경북 영천시 조양공원에 있다.

                                                      <황성 옛터>

 ‘1932년 서울 단성사 무대에 이애리수가 섰다 / 처연한/ 투명한 / 가을처녀의 목소리 / <황성 옛터>가 퍼졌다 // 눈물 가슴에 차고 / 등 뒤에서 비가 퍼부었다 // 한 노래를 세번 불러야 했다/ 청중은 울고 불고 / 울부짖었다 / 고향 개성 / 망한 고려 만월대를 노래한 것 // 일본인 코가 마사오의 / <술은 눈물이냐 한숨이냐>가 / 이 노래의 표절이라는 소문이 났다 // <황성 옛터>를 학생에게 가르친 / 대구의 한 교사는 파면 당했다 // 작곡자 전수린과 코가는 / 서울 소공동에서 어린시절 소꿉동무였다 // 늘 이애리수의 뒤 형사가 따라다녔다 / 늘 전수린의 집 형사가 찾아왔다 / 노래 하나에도 자유는 불가능 했다.’

                                 (고은 시 <만인보>20-5, <황성 옛터> 전문)

 

개성에서 출생해 송도고등보통학교를 나온 작곡가 전수린(全壽麟, 1907~1984, 본명 전수남)은 고등학교 때 외국인 선교사를 통해 배운 바이올린 특기로 악극단 취성좌의 바이올린 악사 겸 작곡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때마침 악극단이 고향 개성에서 순회공연을 하며 머물게 됐고, 이때 짬을 내어 옛 고려궁궐 터였던 만월대를 산책하면서 악상이 떠올라 노래를 작곡했다. 그리고 같이 산책을 나왔던 배재고보 출신의 극작가이자 배우, 작사가인 왕평(王平, 1908~1940, 본명 이응호)이 이 곡에 ‘식민지 청년의 울분이 서린’ 노랫말을 지어 붙였다. <황성(荒城)의 적(跡)>(<황성 옛터>의 원제목)의 탄생이다.

 

           <황성(荒城)의 적(跡)>

1.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못이뤄
   구슬픈 버레소리에 말 없이 눈물져요

2. 성은 허물어져 빈 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나
   아~가엾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
   덧없난 꿈의 거리를 헤매여 있노라

3. 나는 가리라 끝이 없이 이 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정처가 없이도
   아~한없는 이 심사를 가슴속 깊이 품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있거라

                        (1928, 왕평 작사/ 전수린 작곡)

 

이 노래의 작곡가 전수린은 <황성의 적>으로 명성을 얻은 뒤, 이애리수의 <에라 좋구나>(1932), 황금심의 <알뜰한 당신>(1937)과 <외로운 가로등>(1939), 박단마의 <나는 열일곱 살>(1938) 등의 노래들을 연달아 히트시키면서 명성을 얻어 1930년대를 대표하는 대중가요 작곡가로 확실하게 자리매김을 했다.

▲ <황성 옛터>를 부르던 무렵의 이애리수

열여덟 살 극단 막간 가수가 국민의 심금 울려
당시 한국 대중가요의 주류였던 ‘단조 트로트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어, 한국인이 첫 번째로 작사·작곡한 ‘최초의 대중가요’라고도 일컬어지는 이 노래-<황성의 적>을 부른 18살의 막간 가수 이애리수(李愛利秀, 1910~2009)의 본명은 이음전(李音全). 개성이 고향으로 희극배우였던 외삼촌(전경희)의 영향으로 어린 9살 때부터 극단 취성좌의 막간 가수로 활동했다. 그러다 <황성의 적>이 단성사에서의 막간 통곡의 무대공연으로 명성을 얻어 일약 ‘국민가수’의 자리에 오르며 음반 발매 1개월 만에 5만장이나 판매되는 진기록을 세웠다.

일제하에서의 누를 길 없는 나라 잃은 슬픔의 감정과 패망한 옛 고려의 궁궐 터에서 느끼는 상실감이 서로 공감대를 이뤄 온 국민의 가슴을 절절하게 때렸던 것이다.
<황성의 적>은 ‘막간 가수 공연의 호응을 딛고 음반으로 취입해 대중의 인기를 얻게 된 최초의 대중가요’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실상 노래의 기술적인 면-특히 가창력에 있어서는 정확한 음을 유지하지 못하고 생소리를 써서 음을 떨거나 굴리면서 입체감을 표현하려고 흡사 할머니들이 옛이야기 책을 읽거나 어설프게 창가 혹은 찬송가를 부르는 것 같은 설익은 느낌을 준다는 점은, 노래의 완성도 측면에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황성의 적>의 서사적 의미에 더 무게의 중심을 둔 대중들에 의해 끝없이 ‘민중가요처럼’ 불렸다.
이애리수는 <황성의 적> 노래 말고도 희대의 ‘스캔들’로도 떠들썩하게 장안의 신문지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그녀 자신이 이미 한 젊은 자산가와의 사실혼 관계에서 세 살배기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는 유부녀의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역시 처자가 있는 유부남으로서 그녀의 노래에 반해 우연히 알게 된 연희전문대생 배동필과의 사련은, 수면제 음독-면도칼 손목자해 통한 정사 미수 사건에 이르기까지 온 장안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 노인 요양병원에 몸을 의탁했던 말년(99세)의 이애리수 모습

결국 동거까지 불사하며 꺾지 않는 두 사람의 고집에 배동필의 부모가 굴복해 “가수였다는 사실을 일체 세상에 발설하지 않고, 무대를 떠난다”는 조건으로 결혼을 승낙한다. 정말 그 이후 그녀는 거짓말처럼 하루아침에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 후 배동필과 2남7녀의 자식들을 낳고, 오로지 현모양처로만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런 그녀의 말년행적이 세상에 드러난 건, 그녀가 99세로 세상을 뜨기 1년 전인 2008년 경기도 일산에 있는 한 노인 요양병원에서였다. 그렇게 80년 가까운 세월동안 무대와 노래를 가슴에 꽁꽁 싸묻고 오로지 한 남자의 아내이자 아홉 남매 아이들의 보통어머니로만 살아왔던 것이다.

▲ <황성 옛터> 작곡가 전수린(사진 왼쪽)과 작사가 왕평

작사가 왕평 고향 경북 영천에 노래비 세워
<황성 옛터>의 노래비는 이 노래의 노랫말을 지은 작사가 왕평의 고향인 경북 영천시의 조양 공원에 세워져 있다. 왕평은 포리도르 레코드사의 초대 문예부장 출신으로 연극배우와 영화 배우를 겸하고 있으면서 노랫말을 썼다.

그러던 중 1940년 평북 강계에서 당대의 인기 여가수였던 신카나리아와 연극 <남매>를 대역으로 공연하던 중에 무대에서 쓰러져 이내 한많은 이 세상을 떴다. 그의 나이 불과 서른 세 살 때였다.
<황성 옛터> 노래비 뒷면에는 ‘민족의 가슴에 뜨거운 혼을 심은 우리들의 노래’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문구처럼 그는 그렇게 <황성 옛터> 노랫말에 ‘뜨거운 민족혼’을 불어넣으려 혼신의 힘을 다한 예인이었다. 곡명도 그래서 ‘황실 궁궐’이란 뜻의 한자어 ‘황성(皇城)’이 아니라, ‘황폐해진 성’이란 뜻의 ‘황성(荒城)’ 이다.

늘 일제의 사찰대상이었던 왕평의 묘는, 고향이 아니고 그가 5~7세까지 지낸 적이 있는 경북 청송군 파천면 송강리의 국도변 목재숲에 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퇴락한 봉분의 쓸쓸하고도 피폐한 모습이 영락없는 ‘황성 옛터’를 방불케 하는데, 다만 ‘왕평 이응호지묘’라는 작은 돌비가 이곳이 그의 묘소임을 얘기해줄 뿐이다.

 

■ Tip

▲ 개성 송악산 만월대 유적(아래사진은 황성 만월대 복원 조감도)

고려 통일의 꿈을 다진 터전
개성 만월대(滿月臺)

서기 919년, 고려 태조 왕건이 송악(개성)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창건한 때부터 1361년(공 민왕 10년) 홍건적 침입으로 불에 타 없어질 때까지 고려 역대 왕들이 정무를 보며 주 거처로 삼던 궁궐 유적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개성시 송악동으로, 그 규모는 전체가 125만 평방미터 넓이에 궁성 넓이만39만 평방미터로, 비교적 높은 송악산 남쪽기슭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 특징이다. 북한의 국보 제 122호로 201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2007~2015년까지 7회에 걸쳐 남북공동발굴조사가 이뤄졌는데, 이 발굴을 통해 건물 40채의 유적이 확인됐고, 금속활자·도자기 등 1만6500여 점의 유물이 발견됐다. ‘고려 통일의 꿈’을 다졌던 이 궁궐유적을 훗날 망한 고려의 ‘황성(皇城) 유적’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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