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옛날의 트로트 - 노래의 고향을 찾아서

<21>고향 그리는 노래(4) 배호의 <두메산골><물방아 고향>

▲ <두메산골><물방아 고향>앨범재킷

(1) <두메산골>

1.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고향 찾아서
   너 보고 찾아왔네 두메나 산골
   도라지 꽃피는 그날 맹서를 걸고 떠났지
   산딸기 물에 흘러 떠나가도
   두번 다시 타향에 아니 가련다
   풀피리 불며불며 노래하면서
   너와 살련다

2. 혼을 넘어 재를 넘어 옛집을 찾아
   물방아 찾아왔네 달 뜨는 고향
   새소리 정다운 그날 울면서 홀로 떠났지
   구름은 흘러흘러 떠나가도
   두번다시 타향에 아니 떠나리
   수수밭 감자밭에 씨를 뿌리며
   너와 살련다

                  (1963, 반야월 작사/ 김광빈 작곡)

 

▲ <두메산골>노래비

이 노래는 작곡가인 외삼촌 김광빈이 배호에게 “한번 불러봐!”하며, 큰 기대없이 던진 곡이라고 전한다.
남성적인 금관악기로 꽉 짜여진 빅밴드의 리듬, 그 리듬을 앞서 리드하듯 흐르는 중후한 저음의 목소리, 이전의 남성 트로트에서는 볼 수 없었던 특유의 바이브레이션과 절정부에서의 애절한 고음의 호소력… 배호의 등장으로 가벼운 이지리스닝 계열의 서양음악 분위기가 주류를 이루던 1960년대 우리 가요계에 도시 취향 남성 트로트의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

그러나 세간의 평은 그리 곱지 않았다. 한 신문의 연예담당 기자는 배호의 등장을 두고 이렇게 일갈하며 악평을 쏟아냈다.
“요즘 퇴폐적, 처절가련형의 가수가 잠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처절하다 못해 자살 직전인데… 좌우간 좀 기이하다.”

그렇거나 말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신을 다해’ 노래하는 듯한 배호의 등장은 ‘경이로움’그 자체였다. 성별·연령 구분없는 폭발적인 ‘팬덤’현상도 불러일으켰다. 그는 분명 도시를 배경으로 한 끈적한(?) 트로트적 비애감을 계승한 대표적인 남성가수로 단숨에 스타로 떠올랐다.
<두메산골>은 그가 스물 한살 때인 1963년 <굿 바이>란 곡과 함께 세상에 처음 내놓았던 데뷔곡이다.
노련하게 리듬을 타고 넘는 무게감 있는 목소리로만 보면, 누가 이 가수를 스물 한살의 앳된 청년으로 생각할까 싶을 정도로 원숙한 가창력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 최전성기 때의 배호

고향을 주제로 한 노래는 손꼽을 정도
배호(裵湖, 1942~1971)의 본명(호적명)은 배만금(裵晩今), 아명으로 배신웅(裵信雄)이란 이름도 가졌었다.
중국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했다고 전해지는 평안도 출신의 부모님 슬하 4대 독자로 중국 산동성 제남시에서 태어나 해방이 되던 네살 때 귀국했다.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20대 초반까지는 가난의 굴레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친척집, 셋방살이를 전전했다. 학교도 서울 창신동의 창신국민학교를 졸업한 후에, 부산의 이모집에 얹혀 살며 부산 삼성중학교 2학년 중퇴한 것이 전부다. 그후 어머니의 권유로 서울로 상경해 외삼촌인 김광빈 집에 기거하며, 드럼을 배워 김광빈악단에서 드럼을 연주하게 된다. 이때 김광빈이 ‘배호’라는 예명을 지어줬다.

어쨌든 데뷔곡으로 내놓은 <굿바이>와 <두메산골>의 반응이 신통치 않아 가수를 부업으로 하는 드러머 생활을 이어갔다.
이 무렵의 그의 음악경향은 미8군 무대 등에서 익힌 재즈·라틴음악이 섞인 스탠더드 팝 이었다. 그러던 그에게 트로트 가수로서의 운명을 결정지워준 건 <돌아가는 삼각지>였다. 배호의 집안 ‘9촌 아재’되는 배상태가 노래 부를 가수를 찾아다니며 남일해, 남진, 금호동, 그외 무명가수들에게 ‘구닥다리’, ‘스케줄이 바빠서’ 등의 소리를 들어가며 퇴짜 맞고, 3년간 떠돌던 이 노래를 “한번 불러나 봐라” 하고 병상의 배호 머리맡에 악보를 던져놓았던 것. 그때 배호는 그 전해인 1966년부터 신장염을 앓으면서 청량리 성바오로병원 부근의 사글세방에서 어렵게 지내고 있을 때였다.

결국 그 이듬해인 1967년, “놓고 가이소”하고 시큰둥하게 받아든 <돌아가는 삼각지> 악보가 그의 음악인생을 180°로 뒤바꿔 놓았다. <돌아가는 삼각지>의 대히트로 이젠 더이상 카바레 악단에서 드럼을 두드리지 않아도 됐다.

그는 <돌아가는 삼각지>로 MBC 10대 가수상을 받으며 데뷔 4년 만에 톱가수의 반열에 올라섰다. 그리고 <안개 낀 장충단공원>, <누가 울어>, <안개 속으로 가버린 사람>, <파도>, <능금빛 순정>, <황금의 눈>, <비 내리는 명동>, <마지막 잎새>, <ㅇ(영)시의 이별> 등의 노래들이 도미노 흐름처럼 연달아 히트하며 그만의 굳건한 ‘노래성’을 쌓아갔다.
도시적 사랑과 이별을 주제로 하는 노래들이 주류를 이루는 그의 노래들 중에서 어쩌면 ‘촌스러울 수 있는’ 고향을 노래한 곡은 <두메산골>, <물방아 고향>, <황토십리길> 등 손에 꼽을 정도다.

 

(2) <물방아 고향>

1. 물방아 고향 싫어 모두 떠나도
   나 홀로 남아 살자 초가 삼간에
   옥같이 기름진 땅 내가 다듬고
   얼룩소 논밭 갈아 씨를 뿌리며
   한평생 살고지고 물방아 고향
2. 흙냄새 풀냄새를 맡고 살아도
   나 혼자 지키련다 꽃피는 마을
   청대숲 화전밭을 내가 가꾸고
   시냇가 언덕에서 풀피리 불며
   희망에 살고지고 물방아 고향

          (1968, 최치수 작사/ 이철혁 작곡)


1968년 당시의 시대상이 투영된 건전가요풍의 노래다.
그는 길지 않은 시간 내에 톱스타에 오르는 영예를 안았으나, 그러기까지 바쁜 스케줄에 매여 몸을 혹사시켜 신장염에 복막염이 합병증으로 와 대외활동이 거의 불가능 할 지경에 이르렀다.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때의 그의 한달 수입이 아파트 10채 값에 달했고, 전체 대중연예인 국세청 납세 실적순위에서 3위에 오를 정도였으니, 당시 그의 활동상황을 미뤄 짐작하고도 남는다.

1963년부터 1971년 그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8년간 가수로 활동하며 20장의 앨범과 330여 곡의 노래들을 남겼다. 그는 심야방송 출연 후 신촌세브란스병원에 과로와 감기몸살로 입원했다가 ‘회생 불가’ 판정을 받고 미아리 집으로 돌아가던 앰뷸런스 안에서 어머니와 여동생, 작곡가 배상태가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이때 그의 나이 푸르고 푸른 스물 아홉살 이었다.

그의 장례식은 서울 동숭동 마로니에공원에 있던 예총회관에서 가수협회장으로 치러졌다. 이때 소복을 입은 수십명의 여성팬들이 장지인 경기도 양주시 신세계공원묘지까지 눈물로 동행해 주위를 숙연케 하기도 했다.
그는 생전에 대구공연 때 만난 은행원이었던 여성팬과 약혼까지 했으나, 그녀의 극진한 간병도 아무런 의미없이 ‘마지막 잎새’가 지듯이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 <두메산골>노래비가 있는 묘소 전경

그는 우리 대중가요계의 역대 가수들 중 노래비가 가장 많이 세워져 있는 가수다.
전국적으로 모두 7개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는데, 그중 5개가 공식적으로 세워진 것들이다.
-1.<두메산골> 노래비 (2002, 묘소앞) 2.<돌아가는 삼각지> 노래비(2001, 서울 삼각지 녹지공원) 3.<마지막 잎새> 노래비(2003, 경북 경주시 현곡면 하구3리) 4.<파도> 노래비(강릉시 주문진읍 아들바위공원) 5.<비 내리는 인천항 부두> 노래비 (2011, 인천항 연안부두) 또한 그는 1981년 MBC 여론조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가수 1위>에 선정됐고, 2005년에는 광복 60주년 기념 KBS <가요무대>가 선정한 <국민가수 10인>에 올랐다. 그렇게 그는 ‘혼으로 노래한 불멸의 가수’로 ‘죽었어도 죽지 않고’, 국민들의 가슴 속에서 영원히 노래로 살아 숨쉬고 있다.

 

■  Tip

삼각지 로터리

서울 용산구 한강로동에 있었던 우리나라 유일의 입체회전교차로 였다. 교차로 위에 올라서면 둥그런원형의 회전교차로로 한강로 방향과 마포로 이어지는 백범로 방향, 서울역 방향, 그리고 이태원로 방향 등 네 방향으로 빠져나가게 돼 있었다. 이따금 미처 방향을 못잡은 차들이 뒤엉켜 아래로 내려오지 못하고 심한 정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 교차로는 1966년 9월, 당시 ‘불도저’란 별명을 가지고 있던 김현옥 서울시장이 건설계획을 발표했다.
총 2280m, 폭 7.5~16m 규모로 공사비와 보상비 등 총 3억1084만 원의 예산이 투입됐다. 이 교차로는 건설계획 발표 후 1년 3개월만인 1967년 12월27일 박정희 대통령이 개통테이프를 끊으며 ‘삼각지 로터리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개통 27년 만인 1994년 12월, 구조물 노후화와 통행량 과다 초과, 서울지하철 6호선 삼각지역 건설 등 새로운 교통환경의 변화에 밀려 철거됐다.
이 교차로를 소재로 1967년 무명의 신인 배호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은 노래 <돌아가는 삼각지>가 탄생했고, 같은 이름의 영화가 개봉되기도 했다. 또한 철거 후인 2000년에는 교차로가 있던 자리 인근 도로 402m가 ‘배호길’로 명명됐고, 2001년에 로터리 녹지에 <돌아가는 삼각지> 노래비를 세웠다. 또한 지하철 6호선 지하에는 배호의 조각상이 있는 기념 휴게공간이 조성돼 있어 지나는 이들의 눈길을 잡아끈다.

 

▲ 당시의 삼각지 로터리 모습

서울 용산구 한강로동에 있었던 우리나라 유일의 입체회전교차로 였다. 교차로 위에 올라서면 둥그런원형의 회전교차로로 한강로 방향과 마포로 이어지는 백범로 방향, 서울역 방향, 그리고 이태원로 방향 등 네 방향으로 빠져나가게 돼 있었다. 이따금 미처 방향을 못잡은 차들이 뒤엉켜 아래로 내려오지 못하고 심한 정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 교차로는 1966년 9월, 당시 ‘불도저’란 별명을 가지고 있던 김현옥 서울시장이 건설계획을 발표했다.
총 2280m, 폭 7.5~16m 규모로 공사비와 보상비 등 총 3억1084만 원의 예산이 투입됐다. 이 교차로는 건설계획 발표 후 1년 3개월만인 1967년 12월27일 박정희 대통령이 개통테이프를 끊으며 ‘삼각지 로터리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개통 27년 만인 1994년 12월, 구조물 노후화와 통행량 과다 초과, 서울지하철 6호선 삼각지역 건설 등 새로운 교통환경의 변화에 밀려 철거됐다.

이 교차로를 소재로 1967년 무명의 신인 배호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은 노래 <돌아가는 삼각지>가 탄생했고, 같은 이름의 영화가 개봉되기도 했다. 또한 철거 후인 2000년에는 교차로가 있던 자리 인근 도로 402m가 ‘배호길’로 명명됐고, 2001년에 로터리 녹지에 <돌아가는 삼각지> 노래비를 세웠다. 또한 지하철 6호선 지하에는 배호의 조각상이 있는 기념 휴게공간이 조성돼 있어 지나는 이들의 눈길을 잡아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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