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 - 최태성 역사 강사

역사 사용 설명서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역사 스타강사 최태성 씨. 그의 역사 강의는 먼 옛날의 사실관계를 얘기하는데 그치지 않고 현대를 살아가는데 n나침반 역할을 하는 삶의 지침과 교훈을 주고 있다. 그로부터 역사 이야기를 들어본다.

역사는 외울 것이 많은
골치 아픈 과목이 아니라
옛것으로부터 올바른 삶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어야...

을사오적에 대한 분노 기억하고
나라 지키는 지침으로 삼아야

최태성씨는 역사는 외워야 할 것이 많은 골치 아픈 과목이 아니라 우리 삶에 영감을 주고 지혜가 가득한 감동스토리라고 정의했다.
“역사공부는 앞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오늘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 가르침을 받고 실천을 도모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시험을 치를 때면 역사적 사실을 많이 외우는 게 중요하겠지만 시험이 끝나면 외웠던 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맙니다. 하지만 외운 것을 다 잊어도 역사를 배우면서 느꼈던 감정만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일제 강점기에 나라를 일본에 넘긴 을사오적을 공부하며 다들 엄청나게 분노했을 겁니다. 저는 그 분노의 감정만은 절대 잊지 말자고 당부합니다. 그 감정을 기억해 뒀다가 국가와 사회에 관련된 일을 할 때, 책임을 져야 할 상황이 되면 나라사랑을 떠올리며 실행에 옮길 것을 권합니다. 역사공부는 삶에 지침을 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공부입니다. 따라서 역사책을 많이 읽으며 역사 속 인물들의 삶을 내 삶에 어떻게 적용할까를 고민하는 시간을 갖기 바랍니다. 역사인물과 가슴으로 대화를 나눠보세요.”
최태성씨는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시인 이육사와 이순신 장군이라며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육사․이순신의 애국혼 기억해야
“이육사(본명 이원록)는 시인이지만 일제강점기에 무려 17번이나 옥고를 치른 열혈 독립운동가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수인번호인 264를 필명으로 삼았죠. 그는 <꽃>이라는 시를 통해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라며 피 끓는 애국혼으로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의 일원으로서 조국 해방을 위해 청춘을 바쳤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이육사의 애국혼을 받들어야 합니다.”
최태성씨의 이야기는 이순신 장군으로 옮겨갔다.

“이순신 장군은 왜군과의 교전 당시, 선조로부터 수군을 해체하고 육군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에 불복한 이순신 장군은 파직되고 말았죠. 이 사이에 조선의 수군은 일본 수군에게 참패했고, 배가 달랑 12척밖에 남지 않았을 때 선조는 이순신 장군을 수군통제사로 임명했습니다. 이때 이순신 장군은 선조에게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라는 장계를 올렸고, 이후 명랑대첩의 위업을 이뤄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해볼 만하다”며 전의를 불태워 끝내 승전을 이끌어낸 것입니다. 전 살아가면서 이순신 장군의 ‘오히려’라는 말을 제 삶의 마법의 주문으로 삼아 어려움을 헤쳐 나가고 있습니다. 역사는 삶의 해설서이며 해답서입니다.”

역사의 구경꾼이 된 정약용의
비운의 삶은 우리 역사의 불운

최태성씨는 이어 정조와 정약용 이야기를 들려줬다.
”정조는 참으로 힘들게 왕이 됐습니다. 겨우 11살일 때 아버지(사도세자)가 죽었는데, 아버지를 죽인 사람은 다른 사람도 아닌 정조의 할아버지(영조)예요. 정조는 아버지의 죽음에 관여한 신하들이 자신이 왕이 될까 두려워 꾸미는 음모를 감지했어요. 정조는 왕이 되자마자 왕정을 강화하고, 자신을 보호할 관료를 곁에 두는 것, 그리고 정치개혁을 목적으로 왕실도서관인 규장각을 설립했어요.
정조가 모은 관료 중에서 가장 총애하고 신뢰한 인물이 바로 정약용입니다. 다산 정약용은 다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정치, 의학, 지리, 언어학 등을 다룬 500여 권의 책을 써냈고, 시도 여러 작품 남겼습니다. 거중기와 녹로를 발명해 수원 화성 건설에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정조와 정약용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정도로 가까이 지냈습니다. 애주가인 정조가 술을 못하는 정약용에게 술을 건네는가 하면, 활솜씨가 없는 것을 알고 문무를 갖춰야 한다며 활쏘기 연습을 시키는 등 두 사람의 관계는 군신을 넘어 마음을 나누는 벗과 같았습니다. 이런 명콤비가 오래도록 나라를 돌봤다면 조선후기 우리 역사는 로마의 르네상스 못지 않는 발전을 이뤄냈을 겁니다. 안타깝게도 정약용의 집안은 천주교를 믿었기에 정조는 계속 올라오는 탄핵 상소를 뿌리치지 못했습니다. 귀양길에 오르는 정약용에게 정조는 곧 다시 궁으로 불러들이겠다는 은밀한 편지를 건네는 정을 보였지만, 끝내 다시 만나지 못하고 명콤비간 환상의 정치가 무산되고 말았지요. 정약용은 성군인 정조의 선정을 돕지 못한 채 멀리서 지켜봐야 하는 비운의 구경꾼으로 삶을 마쳐야 했습니다. 이는 우리 역사의 불운이라고 봐야지요.”

근대화 앞당길 갑신정변 실패는 비극
최태성씨는 우리 역사에서 새날의 ‘희망’을 품었던 인물들도 소개했다.
“우리 역사상 ‘희망’을 향해 가장 저돌적으로 달려간 사람은 누구일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랬더니 갑신정변을 일으킨 급진개화파가 떠올랐습니다. 이들은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청나라에 대한 사대와 조공 폐지, 신분제 폐지를 주장했습니다.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홍영식, 서광범 등이 그 중심인물인데, 그들은 모두 상류층 집안의 엘리트였습니다.

신분의 혜택을 잘 누릴만한 사람들이었지만 그 특권을 버리고 죽을 때까지 무시당하며 살아야 하는 천민과 함께 하는 세상을 만들자는 꿈을 품었습니다. 1884년 12월 자신들의 계획대로 궁을 접수하고, 청나라에 사대를 하던 세력과 왕실의 민씨 척족을 처단합니다. 이후 청나라로 압송됐던 흥선대원군 귀국과 자주국으로서 청나라의 지배 청산, 신분제 폐지 등 그들이 소원했던 대로 새 나라를 수립하게 됩니다. 하지만 갑신정변은 3일천하로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일본으로 피신한 김옥균은 자객의 총에 맞아 죽었고, 홍영식은 고종의 곁을 지키다가 칼에 맞아 죽습니다. 박영효와 서재필은 외국으로 망명했습니다. 이들의 꿈이 실현됐다면 일본에 식민지배를 당하지 않고, 조국근대화를 앞당기는 커다란 족적을 남겼을 겁니다.”

최태성씨는 역사 속 위인들의 이야기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나침반이 되길 거듭 당부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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