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고 -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 이영보 연구사

▲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 이영보 연구사

무너진 마을 모습에
충격 받은 내가 도리어
어르신께 위로 받는다

우리 속담에 ‘삼 년 가뭄은 견뎌도 석 달 장마는 못 견딘다’라는 말이 있다. 긴 장마 기간에 집중호우로 발생한 곳곳의 피해를 보니 이 말이 더욱 실감이 난다. 며칠 전 전남 곡성에 수해 복구 봉사활동을 나갔다.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마을에 도착해 보니 수마가 할퀴고 간 자리는 상상 이상이다. 마을 입구부터 쌓인 장롱이며 가전제품, 이불과 옷가지, 심지어 아이들 장난감까지, 무거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해로 복구 중인 한 집을 찾았다. 그곳에는 홀로 정리 중인 어르신이 계셨다. 이번 집중호우로 방 안 가득 밀려든 물은 어린이 키만큼 흔적을 남겼다. 꽃다운 나이에 혼수품으로 장만한 자개장도 쓰레기장으로 가고, 흙범벅이 된 옷들을 정리하던 어르신이 한숨을 내쉬자 가슴이 짜르르했다. 마당에 쌓인 옷들을 곱게 접어 끈으로 묶어 버리니 어르신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등으로 찍어 누르시고는 배시시 웃으신다. 버려질 옷들이라도 정성스레 접어 버리니 고마우신가 보다.

오전에 큼직한 물건들을 치운 후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이동하는데, 이상스레 그 어르신이 눈물을 찍어누르던 모습이 가슴에 남았다. 함께 식사하러 가자고 말씀드려도 어르신은 한사코 거절하셨다. 마트에서 서너 개의 빵과 컵라면, 마실 것들을 샀다. 집으로 와보니 어르신 혼자 앉아 밥을 짓고 계셨다. 물에 젖은 냉장고는 작동도 안 될 텐데, 식기들은 어디에서 가져오신 건지, 혹여 상한 반찬이 있으면 어쩌지 염려됐지만, 더 이상의 관심도 누가 될 것 같아 사온 먹을거리를 가만히 전해드리니 따뜻하게 손을 잡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셨다. 포항에 계신 어머니가 떠올라 또 한 번 가슴이 짜르르했다.

질퍽거리는 마당에 찢어진 포대를 겹겹이 깔고 한 줌이라도 수확할 수 있을까 하는 희망으로 참깨 단을 펼쳐봤지만 참깨는 거의 없고 썩은 냄새뿐이었다. 어르신은 1년 내내 힘들게 지은 농사에 미련이 많이 남으셨는지 썩어서 수확이 어렵겠다는 말에 “아니, 아니”를 반복하면서 굽은 허리로 깻단을 나르셨다. 나도 어쩔 수 없이 깻단을 옮겼다. 이미 수확이 어렵다는 걸 아시는 어르신도 깻단을 옮기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무겁게 내려앉은 분위기 속에서 텃밭에 열린 빨간 방울토마토 몇 알이 눈에 들어왔다. 얼른 몇 알 따서 물에 씻어 어르신께 드리고 나도 같이 먹었다. 어르신 표정이 조금은 밝아 보였다. 고마움에 무엇이라도 주고 싶었는데, 토마토라도 나눠 먹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마무리 정리를 하며 어르신께 인사를 드렸다. 내 손을 잡으며 웃어주시는 어르신의 모습에 수재민의 아픔과 함께 따스한 정도 보였다. 무너진 마을 모습에 충격 받은 내가 도리어 피해 당사자인 어르신께 위로를 받은 느낌이다. 한참 동안 손을 흔들며 배웅하는 어르신을 보면서 내가 작게나마 힘이 됐길, 그리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희망을 조금이라도 전했길 바라고 또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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