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 - 이미경 작가

가난했던 시절, 구멍가게 아주머니는 외상장부를 두고 이웃을 반갑게 맞아줬다. 많은 이들의 아련했던 추억의 한 페이지에 그런 골목 구멍가게가 그려져 있을 것이다.
길 한 편의 빛바랜 낡은 구멍가게를 23년째 고집스레 그려오고 있는 이미경 작가를 만나 그의 그림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봤다.

 

점점 사라져가는 추억의 구멍가게
주인아주머니의 구수한 옛 이야기...
이제 그녀에게 구멍가게는 삶의 일부

경력단절을 극복한 힘 ‘구멍가게’
“철이 들어 혼자 놀면서 뭔가를 그리는 게 취미였어요. 그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게 자연스레 몸에 뱄고, 주변 사람들에게 잘 그렸다고 칭찬을 듣다 보니 일찍부터 그림을 그리며 살아야겠다는 꿈을 갖게 됐죠. 이후 서울예고를 거쳐 홍익대에서 쭉 그림공부를 하게 된 거죠.”
그러나 그는 대학졸업 무렵 일찍 결혼을 하고, 아이 둘을 연이어 낳게 되면서 그림 그리기를 멈출 수밖에 없어 좌절이 컸다고 한다.
“그림 그리는 것을 그만두게 된 좌절로 공허했던 시기였는데, 매일 다니던 구멍가게가 어느 순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 거예요. 구멍가계가 제 그림의 단골소재가 된 것이죠.”

그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몸이 좋지 않아 공기가 맑은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관음리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퇴촌리 가게’라는 제목으로 봄날의 가게 모습을 그렸는데, 그림이 좋아 봄풍경을 바탕으로 여름, 가을, 겨울의 가게모습을 상상하며 추가로 그렸어요.”
이후 그는 구멍가게 그리기에 매료돼 10여 년간 여러 곳을 다니며 300여 점의 구멍가게 그림을 그렸고, 그 작품들을 모아 전시회도 여러 차례 가졌다.

섬세한 펜화는 오래 봐도 질리지 않아
“구멍가게를 그리던 어느 순간, 가게가 하나 둘 사라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구멍가게가 나를 기다리지 않고 사라지겠구나...’라는 걱정에 짬을 내서라도 곳곳의 구멍가게를 찾아가 그려야겠다는 사명감이 생기더라고요.
오래 된 구멍가게 그림은 예전의 기억을 새록새록 떠오르게 하고, 감정이 이입된 인격체로 다가온다고 그는 말한다. 이 아름다운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도 좋겠지만 카메라 앵글이 아닌 화가의 시선을 거친 그림으로 기록해봐야겠다는 사명으로 열심히 구멍가게를 그린다고.

“사실적인 묘사를 위해 펜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쉽질 않아요. 유화는 붓으로 툭툭 터치하므로 형체의 느낌이나 색감이 덩어리로 쉽게 표현이 되지만, 펜화는 선이 계속 겹쳐 쌓이고 쌓여 섬세한 부문까지 명료하게 표현해야 합니다. 그러다보니 오래 두고 봐도 지루하지 않아요. 펜으로 점을 찍어 그리다보면 힘이 많이 들고 시간도 많이 걸려요.”
그의 구멍가게 그림에 함께 등장하는 나무도 나름의 사연이 있다.
“구멍가게가 처음 문을 열었을 땐 가게 앞에 마당이 있었어요. 그곳에 나무도 있었고 평상도 놓여있었는데, 세월이 지나 마을이 개발되면서 길이 가게 코앞까지 넓혀지는 거예요. 그래서 가게 앞에 없어진 나무도 그리고 평상도 그려 넣어주니까 가게 아주머니들 아주 좋아하시더라고요. 그림도 더 예뻐지고요.”

▲ 이미경 작가의 구멍가게 그림

구멍가게 그림 소문에 책까지 펴내
그는 자신의 구멍가게 그림에 글이 담긴 책을 내기도 했다.
“책을 두 권 냈어요. 20년간 그렸던 제 가게그림에 대한 소문을 들은 한 출판사 대표가 그림에 글을 담은 책을 내자며 저에게 글도 직접 써보라고 권유하더라고요. 그 용기로 2017년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이란 책을 냈어요. 그 책엔 20년간 그렸던 구멍가게 그림과 소소한 이야기를 담았어요.

글쓰기는 그 책을 마지막으로 끝내려고 했는데, 뜻밖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어요. 그래서 저에게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하고 글을 쓰게 도와준 분들에게 보답의 마음으로 올해 두 번째 책인 ‘구멍가게, 오늘도 문 열었습니다’를 썼습니다. 책 제목에 맞는 가게를 찾아 그림을 그리고 얘기를 모으느라 힘이 많이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출판업계의 관례로는 초판 5천부를 인쇄해야 하지만 운영이 어려운 동네책방을 돕는다는 취지로 표지를 달리해 동네책방 판매용으로 한정판 2500부를 발간했고, 나머지 2500부는 일반서점용으로 펴냈다. 한정판은 이른 시일에 완판 됐는데, 요즘 같은 불황에서는 보기 드문 경우라고 한다.

이 작가는 주변에서 자신을 화가가 아닌 작가라고 부르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저는 본래 화가이고 그림만으로도 충분히 표현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구멍가게가 뭐기에 평생 화두로 삼느냐고 묻기도 하죠. 그래서 그림으로 미처 다 표현하지 못한 것을 글로 쓰게 된 거죠. 그러나 글을 쓴다는 건 조심스러워요. 출판사에서 작가라고 붙여 준 건데 이젠 사람들이 저를 작가라고 부르네요.(웃음)”

구멍가게 그림이 열정과 위안 줘
이미경 작가는 구멍가게 그리기는 자신의 삶에 열정과 위안을 줬다며 여운의 메시지를 남겼다.
“구멍가계를 그리게 된 첫 번째 이유는 구멍가게가 아름답게 보여서입니다. 어린 시절 잊힌 옛 감성을 떠오르게 하는 구멍가게가 점점 사라지는 게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구멍가게 주인아주머니들의 얘기를 듣고 더 사라지기 전에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사명감을 갖게 되면서 줄기차게 구멍가게 그림을 그려왔어요. 그러다보니 구멍가게는 저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의 중요한 일부가 됐죠. 젊은 시절엔 그림을 그리느라 화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어요. 제 그림이 아름다우니까, 아름다움에 감동하라고 그린 게 아니었어요. 사명감으로 그렸어요.

여자는 남자와는 달리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살림과 양육으로 자신이 좋아하던 일과 꿈을 멈추게 돼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에 싸이게 됩니다. 저도 결혼 후 이러한 어두운 상황에 한동안 시달렸어요. 그러나 작은 꿈이었지만 구멍가게 그리기에 대한 꿈을 놓지 않고 끈질기게 붙들고 나가니 힘이 단단해지며 길이 보였어요. 절대 꿈을 접어서는 안 됩니다. 꿈이 이뤄지는 기간이 길다고 주저앉아서도 안 됩니다. 밀고 나가면 반드시 이뤄낼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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