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자수필-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꿋꿋하게 피어난
백합의 기쁨으로
콧노래를 흥얼대며..."

몇 년 전, 집 앞 목도강이 태풍에 강물이 넘쳐 범람했던 적이 있다. 그 까닭인지 요즘 TV 자막에 충북 괴산 목도강 홍수주의보가 계속 뜬다. 친구며 친척들의 관심과 근심 어린 전화가 빗발치고, 우리는 2층 옥상에서 사진을 찍어 전송을 하며 생중계를 하기도 했다. 8월 들어 처음 괴산지역에 쏟아진 게릴라성 폭우로 도로변에서 1~2m 남기고 강물이 차올랐을 땐 아슬아슬 무시무시했다. 건너편 강수욕장(?)이 몽땅 물에 잠기고 흔적도 없었는데, 그날 이후로 비가 소강상태로 점차 강물의 수위가 내려가서 요즘은 비가 와도 안심할 정도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다가 목도다리를 천천히 건너며 강물을 본다. 평소엔 흐름이 완만해서 어느 쪽으로 물이 흐르는지도 잘 모를 만큼 잔잔한데, 지금은 붉은 흙물덩이가 휘몰아치며 스티로폼 같은 잡다한 것들이 함께 떠내려 온다. 출렁이는 세찬 물결에 시선을 따라가면 다리 아래로 빨려들 듯해 무서운 맘에 발걸음을 뒤로 물린다.
물이 빠진 양쪽 강변으로 수많은 갈대가 흙탕물에 쓸려 누워있다. 밤새 쓸려가지 않으려고 뿌리에 매달려 안간 힘을 썼는지, 길게 뻗은 갈대밭은 모두 몸살을 앓는 중이다. 물에 쓸리다 정신을 차리려고 달맞이꽃은 간신히 허리를 세우고 노오란 꽃등을 켜고 있다.

옛날엔 큰물이 나면 물구경도 하고 물 불은 낚시도 했지만 요즘은 장마나 홍수나 가뭄의 자연재해는 단순히 즐길 수 없는 재난상황이다. 들판도 마찬가지다. 잘 자란 대파가 비바람에 쓰러져 녹아내리고, 참깨대에도 곰팡이가 핀다. 이제 따야할 붉은 고추는 갈라 터지고, 달포 이상 햇볕을 보지 못한 벼와 과수와 농작물이 지쳐 병들고 있다. 어르신들은 올해는 소출을 보기가 힘들겠다며 흉년 들겠다 걱정이시다. 이제 장마가 끝나도 뜨거운 여름은 소실되겠고, 모든 생명은 일조량 부족으로 빈혈을 앓을 처지다. 그 바람에 시장의 청과물 가격은 서너 곱절로 뛰었고 과일은 맛이 덜하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먹을 만한 것이 없다.

설거지를 하다 보니 뒷담 텃밭에 발갛게 익은 토마토 몇 개가 보인다. 나는 가랑비에 우산을 받쳐 쓰고 겨드랑이에 바구니를 끼고 밭으로 장보러 나간다. 먼저 뒷밭에 토마토를 따고, 아래 밭에서 웃자란 깨순을 한주먹 꺾고, 몽둥이만 하게 실한 오이고추를 넉넉히 딴다.  옆 밭을 보니 고구마 잎을 고라니가 잘라 먹었는지 고슴도치 가시처럼 고구마 줄기만 뾰족뾰족 서 있다. 어차피 우리는 줄기만 먹으니 나눠먹을 요량으로 줄기를 서너 주먹 뜯어 담았다. 집 입구 쪽으로 자란 호박잎 몇 장을 꺾고, 발이 빠지는 질펀한 밭을 나와 차가 들어오는 도로로 올라섰다.

멀찍이서도 뭔가 깨끗하고 선명하고 환하고 화사한 뭔가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솔로몬왕의 영화가 이 백합만 못하였다’라는 성경말씀이 떠올랐다. 장마에 그 많던 접시꽃이 다 스러지고 봉숭아 꽃잎마저 떨어지는데, 백합화는 어찌 이리 화려하고 우람하게 피어났는지. 그 앞에 서서 한참이나 핸드폰 셔터를 눌러댔다.

현대인의 이기심은 자연만물을 셀카 사진 속의 나를 위해 존재하는 배경이나 레저와 소비공간으로 도구화했지만 나는 우중에 만난 백합화 한 송이에 하나님의 섭리에 깊은 감사와 경탄을 멈출 수 없다. 코로나19로, 긴 장마로 인한 우울감이 확 달아나버렸다. 쏟아지는 빗줄기에 한 바구니의 푸성귀를 끌어안고 우산을 쓰는 둥 마는 둥 어깨와 등이 흠뻑 젖어도 나는 창세기의 행간을 걸으며 꿋꿋하게 피어난 백합의 기쁨으로 콧노래를 흥얼대며 집으로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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