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란 (목포대 교수, 대통령직속 농어업・농어촌 특별위원회 위원)
농업에는 여성 농민이 있고,
농촌에는 여성 주민이 있지만
행사장의 단상에, 각종 위원회의 명단에,
마을개발 기획서에는
여성 농민도 여성 주민도 찾아보기 어렵다.

2019년 통계청 농림어업조사에 의하면 농가인구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51.0%로 근소하게 남성을 상회했다. 한편, 1958년에 설립된 농업협동조합은 40년이 지난 1998년부터 여성조합원의 가입을 허용했고, 2015년부터 여성임원할당제를 도입해서 여성농민이 조합 경영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 2019년 말 여성조합원 수는 전체 조합원의 32.6%를 차지한다. 어림잡아도 농가 인구의 반이 여성 농민인데, 조합원 중 여성은 반이 되지 않는다. 그나마 여성임원할당제 덕택에 전체 1118개 조합 중 여성 이사가 없는 조합이 44개(5.9%)라니 분명 지난 반세기 동안 변화는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 조합장은 8명(0.7%)에 불과하다. 그 많은 여성 농민은 다 어디로 갔을까?

쓰고 보니 올해 5월 개최된 ‘희망을 만드는 농어촌 여성정책 포럼 발족식’에서의 씁쓸함이 되살아난다. 개회사나 축사로 좋은 말씀하신 정장 차림의 일군의 남성의원과 고위 공무원들은 단상에서, 그들의 말씀이 끝날 때마다 박수로 답례했던 더 많은 일군의 여성 농민들은 객석에서, 서로 같은 ‘희망’을 구한 것일까? 당시에 스쳤던 필자의 생각이었다. 가정도, 마을도 국가의 이런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지자체의 위원회 위촉직 위원 중 여성의 비중은 과거 3년간 증가했지만 전국 평균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며, 군 지역의 경우 여성 이‧통장 비중이 10% 미만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서 조사한 2018년 여성농업인실태에 따르면, 여성 농민이 스스로 자신의 직업적 지위를 ‘공동경영주’ 혹은 ‘경영주’라고 인식하는 경우는 응답자의 38.4%에 머물렀다. 여성 농민의 직업적 지위가 ‘예전보다 높지만 남성보다 낮거나 여전히 남성보다 낮다’고 한 응답자는 81.1%나 되었다. 그럼에도 공동경영주 등록은 2016년 1만3362명에서 2019년 3만5925명으로, 연평균 38.5%가 증가했다. 마트에 나온 농산물에 여성 농민의 이름 석자를 찾는 것이 어렵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잘 생기고 실해서 상품성 있는 농산물에는 남편의 이름을, 그렇지 않은 농산물에는 부인의 이름을 생산자로 기재해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 바로 농촌 성 평등의 현주소이다.

요즘 필자는 전라남도의 여러 지자체가 진행하고 있는 농촌 기초생활거점육성사업의 기본계획 자문을 하고 있다. 이는 농촌중심지 기능을 보완하고 지역주민들에게 다양한 서비스를 공급하기 위해 그에 맞는 적절한 공간을 조성하는 농림축산식품부 주관 사업이다. 우리 농촌의 형편이 비슷비슷한 것처럼 지자체마다 계획된 사업들도 대동소이하다. 특히 사업추진단이 주로 마을의 단체장으로 구성돼 있고, 그 단체장들은 한결같이 남성들이라는 점도 비슷하다. 이런 가운데 어느 지자체는 풋살장이나 축구장처럼 특정 성이 선호하는 활동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겠다는 계획을 세웠고, 어느 지자체는 여성친화도시계획이 추진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업과 연결시키지 않았다.

농업에는 여성 농민이 있고, 농촌에는 여성 주민이 있지만 행사장의 단상에, 각종 위원회의 명단에, 마을개발 기획서에는 여성 농민도 여성 주민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 많은 여성 농민은 다 어디로 갔을까? 프랑스 혁명에서 여성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제1공화국 헌법은 남성들에게만 보통선거권을 부여했고, 하물며 여성단체 활동까지 금지시켰다. 올랑프 드 구즈 (Olympe de Gouges)는 프랑스 인권선언에 여성이 포함돼 있지 않은 것에 대항하며 ‘인간과 시민’을 모두 ‘여성과 여성시민’으로 바꾼 ‘여성과 여성시민의 권리선언’을 발표했다. 영국에서는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가 『여성 권리의 옹호』(1792)라는 책을 써서 여성도 남성과 같은 인간으로서의 본성, 즉 이성을 가지고 있으며 남성에게만 한정되어 있던 교육과 참정권을 여성에게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 한국 여성 농민의 처지도 약 300년 전의 올랑프나 메리의 시대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최근 ‘희망을 만드는 농어촌 여성정책 포럼’에서는 여성농업인의 법적 지위 근거를 찾아보려고 노력했지만 「농업농촌 및 식품산업 기본법에서도 「여성농업인 육성법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우리가 그 많은 여성 농민이 어디 갔느냐고 찾고 있는 것도 그들의 ‘법적 지위 없음’과 맞닿아 있다. 법적 지위가 있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징표이다.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는 여성 농민을 남성 농민과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여성임원할당제’나 ‘공동경영주제도’처럼 여성우대정책이나 성평등 정책이 쏟아져도 현실의 여성 농민은 ‘유리천장’은 물론이거니와 ‘유리벽’에 둘러쌓여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 농민이 할 수 있는 일은, 올랑프나 메리처럼 권리를 갖기 위한 ‘인정투쟁’에 앞장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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