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옛날의 트로트 - 노래의 고향을 찾아서

<12> <알뜰한 당신>과 황금심의 노래

▲ 고복수·황금심 부부 노래비(서울 노원구 상계동 당현천 산책로 소재). 윗부분에 부부의 조상이 부착돼 있고, 아랫부분에 물결무늬 모양으로 <타향살이> 1절 가사와 <알뜰한 당신> 1절 가사가 새겨져 있다.
▲ 황금심의 전성기 때 모습

‘방구석 노래’가 맺어준 인연
‘만나는 것은 우연이고, 맺어지는 것은 필연’이라 했던가. 세상의 허구 많은 인연 중에 창밖에까지 흘러나온 노랫소리가 첫 인연이 돼 당대 최고의 스타가수가 된 사람-황금심 얘기다.
때는, 아직은 일제의 서슬퍼런 압제하에 있던 1930년대 중반. 서울 청진동 골목길을 따라 아침 출근을 서두르던 한 사내가 어느 가정집에서 유성기 소리를 타고 흘러나오는 소녀의 낭랑한 노랫소리에 이끌려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그 노래를 듣고 있다가는 이내 그 집 대문을 두드렸다.

이 남자는 바로 오케레코드사 문예부 직원이었고, 다음날 오케레코드사 사무실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고 돌아갔다.
노래의 주인공은 당시 덕수보통학교 4학년짜리 소녀였던 황금심, 아니 황금동(黃金童)이었던 것.(일설에는 레코드가게 점원이 출근길에 낭랑한 여자의 노랫소리를 듣고 그 집에 들러 오케레코드사의 전속가수모집 가요콩쿠르에 한번 나가보라고 권유한 것이 가수의 길로 들어서게 된 인연이 됐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아무튼 황금동은 열 여섯살 나던 해인 1937년, 오케레코드사 가요콩쿨에 나가 당당히 1등을 차지하며 전속가수가 된다.
그리고 데뷔곡 <왜 못오시나요>(박시춘 작곡)와 <지는 석양 어이 하리오>란 노래를 ‘황금자(黃金子)’란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게 된다.

노래는 그런대로 호평을 얻었다. 이때 그녀를 유심히 눈여겨 본 작사가 이부풍(본명 박노홍)과 작곡가 전수린이 그녀를 자신들의 소속사인 빅타레코드사로 끌어들여 황금심 일생일대의 최고 히트작이 된 <알뜰한 당신>(1938, 조명암 작사/ 전수린 작곡)과 <한양은 천리원정>(조명암 작사/ 이면상 작곡)을 내놓게 된다.
작사가 이부풍은 이때 본명인 황금동, 혹은 황금자로 불리던 이름도 ‘황금심(黃琴心)’이라는 예명으로 바꿔줬다.

 

          <알뜰한 당신>
1. 울고 왔다 울고 가는 설운 사정을
   당신이 몰라주면 누가 알아주나요
   알뜰한 당신은 알뜰한 당신은
   무슨 까닭에 모른 체 하십니까요

2. 만나면 사정하자 먹은 마음을
   울어서 당신 앞에 하소연 할까요
   알뜰한 당신은 알뜰한 당신은
   무슨 까닭에 모른 체 하십니까요

3. 안타까운 가슴 속에 감춘 사정을
   알아만 주신대도 원망 아니 하련만
   알뜰한 당신은 알뜰한 당신은
   무슨 까닭에 모른 체 하십니까요

                   (1938, 조명암 작사/ 전수린 작곡)

 

흡사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듯한 낭랑, 청아한 목소리에 노래 고개 고개마다 교태기가 흐르는 황금심의 노래는, 신민요에 길들여진 당시의 트로트 팬들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하늘이 내려준 ‘천상(天上)’의 목소리가 따로 없었다.
목꺾기 뒤에 힘으로 밀어내는 목소리의 가느다란 떨림(바이브레이션)과 콧소리의 여운은, 애조띤 이 노래의 맛을 한층 더 고조시켰다. 이때 이후 ‘꾀꼬리의 여왕’이란 별명이 붙었다.

<알뜰한 당신>이 기대 이상의 빅히트를 하자 생각지도 않았던 문제가 터졌다. 처음 황금심을 전속가수로 뽑아 황금자란 이름으로 판까지 냈던 오케레코드사가 ‘이중계약’을 이유로 빅타레코드사를 상대로 법적 소송에 나선 것. 이 법적 분쟁은 결국 가족들이 나서면서 일단락 됐고, 황금심은 여전히 빅타레코드사에 남아 이른바 ‘전수린-이부풍 사단’의 스타가수로 활동을 이어가게 됐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939년 4월 버림받은 한 여인네의 비련 실화를 소재로 이부풍이 노랫말을 지은 블루스 리듬의 <외로운 가로등>을 내놓는다.

 

            <외로운 가로등>
1. 비오는 거리에서 외로운 거리에서
   울리고 떠나간 그 옛날을
   내 어이 잊지 못하나
   밤도 깊은 이 거리에 희미한 가로등이여
   사랑에 병든 내 마음 속을
   너마저 울어주느냐

2. 가버린 옛 생각이 야속한 옛 생각이
   거리에 시드는 가슴 속을
   왜 이리 아프게 하나
   길모퉁이 외로이 선 서글픈 가로등이여
   눈물에 피는 한송이 꽃은
   갈곳이 어느 편이냐

3. 희미한 등불 아래 처량한 등불 아래
   죄없이 떨리는 내 설움을
   뉘라서 알아주려냐
   심지불도 타기 전에 재가 된 내 사랑이여
   이슬비 오는 밤거리 위에
   이대로 스러지느냐 

              (1939, 이부풍 작사/ 전수린 작곡)

 

▲ 황금심을 일약 가요계 스타로 키운 작곡가 전수린(왼쪽)과 작사가 이부풍

이 노래는 작사가 이부풍이 직접 목도한 버림받은 한 가여운 여인의 얘기가 노랫말의 배경이 됐다. 1937년 겨울,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에 이부풍이 거나하게 술을 먹고 기생집인 명월관(현재의 광화문 동아일보사 자리) 앞을 지나는데, 웬 묘령의 여인이 명월관 앞 가로등 밑에서 우산을 받쳐들고 서서 명월관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 다음날 저녁도 마찬가지였다. 사흘째 되던 날, 이부풍이 궁금증을 견디다 못해 그 여인에게 다가가 자신이 작가임을 밝히고 사연을 캐물었다.

여인은 의외로 순순히 속내를 털어놨다.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여학교 졸업 후 기생집에 들어가 돈을 벌어 그 사람의 학비 뒷바라지를 하게 됐고, 그 덕에 남자는 일본 와세다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검사가 됐다는 것.
그런데 이제와서 둘의 관계를 ‘없었던 일’로 하자며 만나주지를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 이렇게 혹시나 하고 그가 자주 드나든다는 기생집인 명월관 앞에서 드나드는 사람들 얼굴 하나하나를 살펴보고 있노라고 했다.

그리고, 더욱더 그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의 하나- 지금 그녀의 뱃속엔 그 남자의 아이가 자라고 있다며 오히려 자랑스러워 하더라는 것이다. 이부풍은 이 가녀린 여인의 순애보가 너무도 애처로워 눈물을 흘리며 집에 돌아와 <외로운 가로등> 노랫말을 지었다는 것이다.

이 노래를 내놓으면서 빅타레코드사측이 내건 광고문구가 눈길을 끈다.
- ‘황금심 양의 새로운 창법, 전수린 군의 심혈을 부은 근대 희유(稀有, 흔치않은)의 걸작 입니다.’
이는 당시 황금심의 노래 <알뜰한 당신>과 <외로운 가로등>이 곧 한국 근대 대중음악의 상징성과 원형질을 그대로 보여준 곡이라는 것에 대한 자부·자존심의 표현이었다. 한 소절 한 소절 숨을 들이마셨다 토해 내듯한 호흡의 강약조절과 절제가 탁월한 황금심의 창법은, 노래의 애잔함을 더해줬다.

▲ 고복수·황금심 부부

신앙과도 같았던 ‘외길 남편 사랑’
원래 부산 동래 태생인 황금심은 젖먹이 시절 서울로 이사와 도심 한복판인 청진동에서 자랐다. 그녀가 덕수보통학교 시절에 집에서 유성기를 틀어놓고 노래를 즐겨 불렀던 것을 보면, 나름으로 그다지 궁색하게 살던 집은 아니었던 듯 싶다.
황금심이 아직 어린 스무 살 나이에 10년 연상의 울산 출신 노총각인 <타향살이>의 가수 고복수(高福壽, 1911~1972)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집안 특히 아버지는 펄쩍 뛰며 극구 반대를 했다. 주위에 인텔리 여성이며 화류계 기생팬들이 들끓는 당시의 인기가수와 결혼하면 불행해질 수 있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머리 삭발까지 불사하는 황금심의 뚝심에 부모님들이 백기를 들었다.
기실 고복수 또한 신인가수 황금심에게 마음을 빼앗겨 소속사를 옮긴 터였다.
두 사람은 3년 간의 뜨거운 비밀열애 끝에 1941년 결혼식을 올렸다. 이들의 결혼은, ‘우리나라 스타커플 1호’라 해 온 나라 안에 일대 화제가 되기도 했다.
훗날 황금심의 회고에 따르면, 보통학교 3·4학년 때 조선총독부 관립극장이었던 부민관에서 있었던 고복수 공연을 보고 ‘하늘에서 내려온 분’이라고 생각하며 한눈에 반했었다는 것이다.

그녀의 고복수를 향한 일편단심은 신앙과도 같았다. 고복수가 1958년 가요계에서 은퇴하고 영화제작이며, 택시운수사업 등의 잦은 실패로 생계의 어려움마저 겪는 상황에서 1972년 식도암으로 60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눈 파는 일 없이 오로지 그만을 바라보며 살았다.
“몸에 칼이 들어와도 거짓말하며 살지 말라며 엄격하셨던 아버지 앞에서 등이 파인 드레스 한번 입어본 적 없이 한복만을 입고, 이를 드러내고 웃은 적 없는 어머니셨다”고 가수인 아들 고영준(63)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얘기한 적 있다.

▲ <삼다도 소식> 노래비(제주시 대정읍 하모3리 섯산이물공원 소재)

6.25직후인 1951년 민요가수 황정자가 불렀던 <삼다도 소식>을 1952년에 다시 불러 히트시키며, 명실공히 이화자·황정자와 더불어 ‘3대 민요가수’의 위상을 공고히 했다. 그렇게 1970년대까지 무려 4000여 곡의 노래를 쉼 없이 불렀다. 그 배경에는 남편 고복수의 연이은 사업실패에 따른 생계의 어려움이 깔려 있었다. 당시 거의 모든 연속방송극 주제가와 영화주제가는 황금심이 도맡아 놓고 불렀다. 돈 되는 일이었으므로… 그런 연유로 시중에 축음기 있는 집과 라디오에서는 틀기만 하면 황금심의 노래가 수돗물처럼 흘러나왔다.

<울산 큰애기>(1937), <초립동>(1941), <뽕따러 가세>(1957), <풍년가>(1960), <장희빈>(1961) 등의 노래들은 그때의 유명했던 히트곡들이다.
슬하에 3남2녀를 두고 3대 음악가족을 이뤘으나 그 늦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파킨스씨병을 얻어 투병하다 2001년 79세에 한 많고 고단했던 이승살이의 날개를 접고 저 세상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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