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옛날의 트로트- 노래의 고향을 찾아서

<10> <단장의 미아리 고개>와 <삼팔선의 봄>

 

이해연의 <단장의 미아리 고개>
<가요무대>집계 6.25노래 애창곡 1위

해마다 6.25가 돌아오면, 흡사 기다렸다는 듯이 이곳 저곳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이해연(1924~2019)이 부른 <단장(斷腸)의 미아리고개>(1955)다.
그래서 서울 성북구의 미아리고개는 우리나라 전 국토를 통틀어 그 어느 고개보다도 세상에 잘 알려져 있다.
죽어서 두 눈을 감기 전에는 차마 못 잊을 6.25전쟁은, 우리 민족 모두에게 너무나도 많고도 깊은 상처를 안겨줬다. 이 노래는 흡사 창자가 끊어질 것 같은 그때의 슬픔을 절절한 절규와 피맺힌 호소로 부른 ‘애끓는 절창’이다.

‘몹시 슬퍼서 창자가 끊어지는 듯하다’는 뜻의 ‘단장’이란 말의 유래가 된 중국 고사가 있다.
중국 진나라 때 환온이라는 무장이 촉나라 정벌을 위해 배로 양자강 협곡을 건너는데, 그의 부하가 새끼원숭이 한 마리를 잡아 배에 태웠다. 그러자 어미 원숭이가 산기슭을 따라 내려오다 마침내 제 새끼가 잡혀있는 배에 뛰어내렸는데, 그만 잘못돼 죽고 말았다.
부하가 그 어미원숭이 배를 갈라보니, 창자가 마디 마디 끊어져 있었다고 하는 고사다.

▲ <단장의 미아리 고개> 노래비. 특이하게도 널따란 주석철판에 구멍 뚫듯이 가사 글자를 새겼다. 서울 성북구 미아리 고개 정상 ‘시민의 쉼터’에 광복 50주년을 맞아 1996년 성북구청이 사적비와 함께 세웠다.

이 <단장의 미아리 고개> 노랫말에도 단장의 애달픔이 서린 숨은 얘기가 있다. 노랫말을 지은 작사가 반야월(1917~2012)은 6.25 때 서울 미아리에 살았는데, 북한군이 서울로 밀고들어오 자 가족들을 집에 남겨둔 채 혼자만 경북 김천으로 피신했다. 9.28 서울 수복 후 집엘 찾아가니, 다섯 살짜리 딸 수라(秀羅)가 보이지 않더라는 것. 아내의 이야기인즉, 여름 내 호박죽과 감자죽으로 연명하던 딸아이가 급기야는 영양실조로 숨졌다는 것이었다.

반야월은 6.25만 돌아오면 그때 세상 떠난 딸아이 생각에 악몽에 시달렸다.
그것을 직접 눈앞에서 보고 겪은 아내는 그 심경이 어떠했을까… 그런 아내의 심경에서 아내가 화자가 돼 남편을 기다리는 간절한 소망을 비통한 마음으로 한 소절 한 소절 써내려 간 것이 <단장의 미아리 고개>였다는 것이다.

 

▲ <단장의 미아리 고개> 앨범재킷.

           <단장의 미아리 고개>
1. 미아리 눈물고개 님이 넘던 이별고개
   화약연기 앞을 가려 눈 못뜨고 헤매일 때
   당신은 철사줄로 두손 꽁꽁 묶인 채로
   뒤돌아 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한많은 미아리 고개

 - - - -  (간주 중 중간 대사) - - - -
     
“여보, 당신은 지금 어데서 무얼하고  계세요. 어린 용구는 오늘 밤도 아빠를 그리다가 이제 막 잠이 들었어요. 동지 섣달 기나긴 밤 북풍 한설 몰아칠 때 당신은 감옥살이 얼마나 고생을 하세요. 십년이 가도 백년이 가도 부디 살아만 돌아오세요, 네. 여보! 여보~!”

2. 아빠를 그리다가 어린 것은 잠이 들고
   동지섣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칠 때
   당신은 감옥살이 그 얼마나 고생하오
   십년이 가도 백년이 가도 살아만 돌아오소
   울고넘던 이 고개여 한많은 미아리 고개

                              (1955, 반야월 작사 / 이재호 작곡)

 

▲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부른 가수 이해연의 말년 모습.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철사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 맨발로 절며 북한군에게 끌려간 남편의 모습을 그려, 듣는 이 모두를 따라 울게 한 이 노래를 부른 가수 이해연(1924~2019)은 황해도 해주가 고향이다. 17세 때인 1941년 콜럼비아 레코드사를 통해 전속가수가 됐다.
첫 데뷔곡은 일본인 작곡가의 엔카곡에 조명암이 가사를 붙인 번안가요 <백련홍련>인데, 일제 말기의 전형적인 친일 군국가요였다.

그후 1945년 8.15 해방 때까지 21곡의 가요를 발표했는데, <소주 뱃사공> <뗏목 이천리> <황해도 노래>가 대표적인 노래들이었다. 이 시기에는 전과는 사뭇 달리 이미지와 분위기 변신을 꾀한 흔적이 역력하다.
8.15 광복 후에는 미8군 무대로 진출해 주로 재즈노래를 불렀는데, 이때 악단의 트럼펫 연주자로 치과의사 출신인 김영순(베니 김)과 연애결혼한 후 1950년대에 <통일의 전선> <슈샤인 보이> <국군의 아내> 등의 노래를 남겼다.

▲ 이해연 앨범재킷.

그러던 중에 <단장의 미아리 고개>, 이 한 곡의 대히트로 그녀가 일제 말기에 겪었던 ‘친일 군국가요 가수’라는 수치스러운 이미지와 그에 따른 수모, 열등의식을 단번에 씻어냈다.
그리고 1974년경, 홀연 그녀의 친동생(1955년 <황혼의 엘레지>를 부른 가수이자 연극배우 백일희-본명 이해주)을 포함한 온가족이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떠났다.

남편 김영순은 1984년 타계했고, 그녀는 1985년부터 워싱턴주 페더럴웨이에서 줄곧 살며 독실한 신앙생활을 이어가다 2019년 12월 미국 시애틀에서 뇌출혈로 세상을 떴다.
슬하에 3남2녀를 뒀는데, 그들 중 김파(기타)·김담(드럼)·김선(건반) 삼남매가 그룹 ‘김트리오’를 결성, 1979년 <연안부두>(조운파 작사/ 안치행 작곡)를 불러 크게 히트시키기도 했다. 인천 연안부두에 그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 <단장의 미아리 고개> 작곡가 이재호(왼쪽)와 <삼팔선의 봄> 작곡가 박춘석.

 

최갑석의 <삼팔선의 봄>
고향 그리움·시대의 아픔 노래해

6.25 전쟁 때 불렸던 진중가요(陣中歌謠) 중에서 신세영의 <전선야곡>과 더불어 가장 많이 불렸던 대표적인 노래의 하나가 최갑석(崔甲石, 1937~2004)의 <삼팔선의 봄>이다.

 

           <삼팔선의 봄>
1. 눈 녹인 산골짝에 꽃이 피누나
   철조망은 녹슬고 총칼은 빛나
   세월을 한탄하랴 삼팔선의 봄
   싸워서 공을 세워 대장도 싫소
   이등병 목숨바쳐 고향 찾으리
2. 눈 녹인 산골짝에 꽃이 피는데
   설한에 젖은 마음 풀릴 길 없고
   꽃 피면 더욱 슬퍼 삼팔선의 봄
   죽음에 시달리는 북녘 내 고향
   그 동포 웃는 얼굴 보고 싶구나

                (1958, 김석민 작사/ 박춘석 작곡)

 

▲ 최갑석의 방송(가요무대) 출연 화면.

성악가 스타일의 발성에 미성의 소유자인 최갑석은 이 노래 작곡자인 박춘석(1930~2010)과 조금 별난 인연이 있다.
전북 임실(임실읍 이도리 736) 태생인 최갑석이 고등학교 2학년 때 전주에서 개최된 가요콩쿠르에 나가 1등을 했다. 물론 학생 신분임을 숨기고 참가했던 것. 이때 이 콩쿠르의 심사위원이었던 작곡가 박춘석이 “고등학교 졸업 후에 서울 오아시스레코드사로 날 찾아오라”고 귀띔해 줬다.
(훗날 <삼팔선의 봄>을 최갑석에게 부르게 한 박춘석 작곡가는 생전에, “내가 죽고 나면 <삼팔선의 봄>을 노래비에 새겨 휴전선 가까운 곳에 세워달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최갑석은 고교 졸업 후 전주에 있는 한 악기점에 잠시 취직했다가 곧바로 상경해 작곡가 박춘석을 찾아가 가수의 길로 접어들게 됐다. 그는 1957년 <불국사 길손>(반야월 작사/ 박춘석 작곡)이란 곡으로 데뷔한 이후, <철민의 노래>(1958), <사랑의 참뜻>(1958), <서귀포 나그네> 등의 노래들을 잇달아 세상에 내놓았으나 별로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던 중에 1958년에 부른 <고향에 찾아와도>(조경환 작사 / 이재호 작곡)가 큰 인기를 얻어 스타로 발돋움 하게 됐다.

▲ 최갑석 노래비(전북 임실군 관촌면 사선대 국제조각공원 소재)

당시 <고향에 찾아와도>는, ‘시대의 아픔과 고향 그리움을 노래한 건전가요’라며 방송에서 집중적으로 내보내 뜻하지 않게 그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그는 1974년 미국으로 이민 가 필라델피아 인근 랜즈데일 노인아파트 관리소장으로 일하다가 2004년 9월 말에 고혈압과 대동맥질환으로 긴급수술을 받았으나 의식불명인 상태에서 끝내 깨어나지 못하고, 그해 10월 중순 가족 동의하에 생명유지장치를 제거해 불우하게 세상을 떴다. 그는 67세라는 길지않은 생애를 살면서 50여 곡의 노래를 세상에 남겼다.

그의 고향인 전북 임실군 관촌면 소재 사선대 국제조각공원에 그의 대표곡인 <삼팔선의 봄>과 <고향에 찾아와도> 가사가 좌우에 새겨져 있는 노래비가 2013년에 세워졌고, <최갑석 가요제>가 2010년부터 해마다 임실치즈축제 기간에 열리고 있어, 그의 때묻지 않은 맑은 노래를 추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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