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손자 녀석의
벙글벙글 웃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꽃 중에서도 사람꽃이
제일 이쁘지 않은가..."

어딜 봐도 푸르름에 물들어버린 온 세상이라, 그와 반대로 푸르지 않은 색만 눈에 들어온다. 앞산에 하얗게 밤꽃이 피어 밤나무가 보이고, 마당 아래로 빨간 앵두와 왕보리수가 선명하다. 꽃밭에는 하늘나리가 주황색을 토하며 하늘을 향해 나팔을 불고 있다. 마당을 가로 지르는 회양목 앞으로 섬초롱꽃이 흰 모시치마를 차려입고 고개를 떨구며 다소곳하다. 집 입구 간판 앞 작은 꽃밭에는 기린초가 노랗게 꽃을 피워 땅에 바싹 몸을 붙여 앙증맞다. 

간판을 뒷담 삼아 키 큰 접시꽃 한 무더기가 아래로부터 손바닥만 한 자줏빛 꽃을 차례로 피워 올리고 있어 집 입구에 들어서면 정신이 번쩍 들면서 이목을 집중시킨다. 보라색 둥근 화형의 한 무리 산파는 좀 더 보고 싶었는데, 이번 비에 다 이지러져서 실망스럽게 몇 가닥만 남았다.
집 뒤안에 피기 시작한 참나리는 주근깨투성이 고아 소녀 ‘빨강머리 앤’을 연상시킨다. 주홍색 얼굴에 검은 깨를 잔뜩 뿌리고 6장의 꽃잎은 뒤로 심하게 말린 데다가 꽃 중앙에 검은 꽃밥을 매단 6개의 수술이 둘러섰다.  가운데 한 개의 암술이 길게 꽃 밖으로 돌출돼 있어 한 번 보면 영 잊을 수 없는 모양새다.

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사람들은 왜 꽃을 좋아하는 걸까? 모양이나 색이 예뻐서인가? 향기로워서일까? 나날이 다달이 철마다 꽃은 피어 인생을 기쁘게 하지만 아무리 어여쁜 꽃도 반드시 진다.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김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 앞집의 그 화려하던 줄장미도 지난 비에 후즐근하게 퇴색해 빛을 잃고, 옆집 밭에 한 가득 피었던 작약꽃도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열흘 붉은 꽃은 없다 한 것이 권세나 영화가 오래가지 못함을 빗댄 말이거니 했더니 겨우 열흘을 넘기지 못해서 꽃인가 보다.

일 년을 기다려 피어난 그 시간이 너무 짧아서 꽃인지도 모른다. 지기 위해 피는 꽃, 세상을 밝히던 꽃이 진다. 특히 이맘 때 장맛비가 쏟아지면 꽃은 피지도 못하고 떨어지고, 줄기는 꺾이고, 잎은 찢어져 흙이 튀어 꽃밭이나 남새밭은 금방 난장판이 된다. 나는 장마에 피는 백합을 한 번도 제대로 보질 못했다.

그럼에도 꽃이 지고 나면 열매를 달고 씨가 맺힌다. 매실나무에서 매실을 따고, 뽕나무 아래서 손톱 밑이 새까매지고 입안이 시커멓게 물들도록 오디를 따 먹는다. 배나무 어린 열매는 배봉지에 싸이고, 자두는 매달린 알이 굵어져 나뭇가지가 늘어져 내렸다.

올 여름에는 작은 딸 가족이 괴산집에서 휴가를 보내려고 한다고 전화가 왔다. 여섯 살배기 손자가 등산도 좋아하고 강에서 낚시를 하거나 올갱이 잡는 걸 좋아한다고. 나는 7월 첫 주 자두가 익을 때쯤이 좋다고 일러뒀다. 손자 녀석의 벙글벙글 웃는 모습이 눈에 선한 것이 꽃 중에서도 사람꽃이 제일 이쁘지 않은가. 슬며시 가슴이 부풀어 오르고 마음이 설레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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