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옛날의 트로트 - 노래의 고향을 찾아서

<8> 백난아의 <찔레꽃>

▲ <찔레꽃>노래비 공원(제주시 한림읍 명월리 소재). 백난아 고향마을의 옛 ‘명월국민학교’ 정문 옆 부지(약 200평)에 2007~2008년 마을 주민들이 <찔레꽃> 노래비와 백난아 기념비를 각각 세웠다. 그러나 관리부실로 폐허처럼 퇴락해가고 있어 안타까움이 크다.

노래만이 살길이라 생각
여자가 별다른 용무 없이 바깥세상 출입이 쉽지 않았던 시절, 그래서 여자가 행복하게 살아가기에는 참으로 버거웠던 시대에 ‘노래로 한 세상 살아보겠다’고 나선 단발머리 어린 여자아이의 딱 바라진 배포와 맹랑함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백난아. 아니 어린 오귀숙(吳貴淑)은 깜깜하게 가난한 집안 어디에도 기댈 수 있는 희망이 없었으므로, 그리하여 자신의 앞길을 스스로 헤쳐나가지 않으면 안되었으므로….

당시 어린 그녀의 눈에 비친 트로트- 유행가의 세계는, 촌스러운 문화가 아니라 도시적 문화였고, 그것에의 도전만이 자신이 절벽같은 가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학교 가는 길 레코드 가게 앞을 오며가며 귀동냥으로 익힌 유행가 노래만큼은 그 누구에도 지지 않을 만큼 자신 있다는 당돌함이 열세 살 가녀린 그녀의 등짝을 콩쿠르 경연장으로 떠밀었다.

▲ 백난아의 전성기 때 모습.

열다섯 살 ‘소녀가수’의 탄생
백난아의 본명은 오귀숙. 1927년 제주시 한림읍 명월리 1734번지에서 마을 토박이인 군위 오씨 오남보씨의 3남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농사채 하나 없이 바다에 나가 방어를 잡는 어부였는데, 그 일로 여덟식구 입에 풀칠 하기는 영판 힘들었다. 결국 온 가족이 새로운 삶을 찾아 제주 고향마을을 떠나 땅 설고 물 설은 머나먼 만주로 이주를 했다. 그곳에서도 안주하지 못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함경북도 청진으로 옮겨 가 정착하게 된다.

만주땅으로 이주할 때가 백난아의 나이 젖내 가시지 않은 세살 때였고, 청진으로 이사했을 때가 아홉살 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가족 모두가 줄곧 청진에서 살면서 보통학교(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다. 학교에 다니면서도 어린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통 노래 콩쿠르 밖에 없었다.
그녀는 열 세살 나던 해인 1940년부터 청진 일대에서 열리는 각종 노래경연 콩쿠르에 나가 최고상을 휩쓸었다.

물론 처음에는 집에는 일체 비밀로 했다. 그러다 학교에 알려지면서 퇴학 직전에까지 사태가 악화되자 그때서야 집안에 털어놓고 동의를 구했다. 유행가 가수가 되겠노라고… 청진 동덕보통학교 6학년 때 빅타레코드 주최 청진콩쿠르에서 1등 한 것을 시작으로 북성여중 1학년 때 콜럼비아 레코드사 주최 전국콩쿠르 1등, 그 이듬해인 열 다섯살 때 태평레코드사와 조선일보가 공동주최한 회령콩쿠르에서 1등 하면서 서울 본선에 진출, 공동 1위를 차지해 태평레코드사 전속가수가 되면서 그토록 열망하던 트로트가수로서 첫발을 내딛게 된다. ‘소녀가수’의 탄생이다.

▲ 백난아를 발탁한 <찔레꽃> 작곡가 김교성(그는 <울고 넘는 박달재> 작곡가 이기도 하다).

아직 앳된 열다섯살 이었지만 제법 처녀티가 났고, 당차기까지 한 ‘낭랑한 목소리의 소유자’ 백난아를 콩쿠르에서 ‘미완(未完)의 대기(大器)’로 점찍은 이는 당시 회령콩쿠르 심사위원 이었던 <울고넘는 박달재>의 작곡가 김교성(金敎聲, 1904~1961)과 이재호, 그리고 <나그네 설움>의 가수 백년설(白年雪, 1914~1980) 이었다. 특히 백년설은 백난아를 자신의 수양딸로 삼고, 오귀숙이란 이름을 성은 자신의 성씨를 따 백씨로 하고, 이름은 ‘난초처럼 청아한 아이’란 뜻의 ‘난아(蘭兒)’로 예명을 지어줬다.

▲ 백난아를 수양딸로 삼고 ‘백난아’라는 예명을 지어준 당시 톱가수 백년설.

1940년, 백난아는 곧바로 어린 자신의 노래인생을 그린 것 같은 노랫말로 돼 있는 <오동동 극단>(이재호 작곡)을 첫 데뷔곡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그 여세를 몰아 스윙재즈 스타일의 <황하다방>과 <갈매기 쌍쌍> <망향초 사랑> <땅버들 물버들> <도라지낭랑> <아리랑낭랑>, 그리고 <찔레꽃>을 줄줄이 세상에 선보였다.

1949년에는 작곡가 박시춘이 사주인 럭키레코드로 전속을 옮겨 <낭랑18세>와 <금박댕기>를 냈다.
이중 특히 <찔레꽃>은, 노래 시작 전에 흡사 무성영화의 변사처럼 비장하면서도 처연한 목소리로 읊어내려간 ‘오프닝 대사(사설)’가 듣는 이들의 오감을 자극했다.
-“이른바 일제가 일으킨 태평양전쟁의 풍운이 휘몰아 치던 날 / 우린 그 어느 때보다 슬픈 별 아래 서야 했다 / 절망의 황혼… 우리는 허수아비… / 남의 나라 전쟁터로 끌려가던 젊은이들의 충혈된 눈동자…/ 처녀들은 일본군 위안부에 끌려갈까봐 시집을 서둘렀지…/ 못견디게 가혹한 그 계절에도 찔레꽃은 피었는데…”

 

             <찔레꽃>
1.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자주고름 입에 물고 눈물 젖어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잊을 동무야

2. 달 뜨는 저녁이면 노래하던 세 동무
   천리객창 북두성이 서럽습니다
   삼년 전에 모여 앉아 백인 사진
   하염없이 바라보니 즐거운 시절아

3. 연분홍 봄바람이 돌아드는 북간도
   아름다운 찔레꽃이 피었습니다
   꾀꼬리는 중천에서 슬피 울고
   호랑나비 춤을 춘다 그리운 고향아  

(1942, 김영일 작사 / 김교성 작곡 )

 

<찔레꽃>이 태평레코드사에서 발매된 건 1942년 3월. 슬픈 정조를 드러낸 장조의 노래로 백난아 특유의 낭랑한 목소리가 돋보이는 이 노래는, 처음 발매 당시에는 반응이 그닥 신통치 않았다. 그러던 것이 1945년 8.15 광복 후 인기를 더하기 시작해 해방공간과 6.25를 거치면서부터는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면서 백난아의 인기가 치솟아 올랐다.

▲ 백난아의 히트곡 앨범들.

<찔레꽃>이 뒤늦게 대중들의 인기를 얻기 시작한 가장 큰 요인으로는, 당시의 시대상황을 든다.일제시대-8.15해방-6.25전쟁이라는 질곡의 역사적 극한상황을 겪어내면서 삶의 터전인 고향을 잃고 몸과 마음이 헛것으로 떠도는 민초들의 고단한 삶을 다독이듯 위무해 주는 노래라는 것. 당시 트로트들이 줄기차게 그려 온 눈물 찍어내는 신파가 아니라, 누구나가 맘속에 그리는 소박하고도 푸근하고 정겨운 고향풍경을 그려주고 있는 노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설에는 작곡가 김교성과 작사가 김영일, 그리고 백난아가 만주공연을 다녀온 뒤 만주독립군들의 고향 그리는 심정을 담아 노래를 만들었다는 것인데, 3절 가사가 북간도를 배경으로 한 것 하며 북방에서 남쪽나라 내 고향을 못잊는 실향민들의 애절함이 담겨 있는 가사내용 등등을 인기비결의 하나로 꼽기도 한다.

죽기 한 해 전까지 무대에 서
백난아는 1945년 8.15 해방 후 파라다이스 쇼단과, 6.2 5전쟁 후 악극단을 직접 꾸려 운영하면서 사업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왕성하고도 의욕적인 사회활동은 훗날 서울에서의 양재학원·예술학원·극장(서울극장)·다방(백난다방) 경영으로까지 연결돼 그녀의 또다른 면모를 엿보게 했다.
우리나라 트로트계를 대표하는 ‘엘레지의 여왕’ 가수 이미자(80)는, “10살 때인 부산 피난시절 부산 동아극장에서 백난아의 공연을 보고 ‘가수의 꿈’을 가졌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지난 4월 KBS <가요무대>프로에서는 지난 35년간의 방송기간 중 가장 많이 불린 곡으로 총 방송횟수 175회 였던 백난아의 <찔레꽃>이 1위에 올라 명실공히 ‘최고의 국민애창곡’임이  입증되기도 했다.(참고로 2위곡은 박재홍의 <울고 넘는 박달재>, 3위곡은 한정무의 <꿈에 본 내고향> 이었다.)
1960년대까지 주로 극장무대에서 활동하면서 자신의 고향인 제주도에는 1957, 1961, 1986년 세차례 내려가 현인과 한림문화관 (옛 한림극장)에서 공연을 갖기도 했던 백난아는, 1992년 66세에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1년 전까지 흔들림 없이 무대에 올라 만인의 애창곡이 된 <찔레꽃>을 불렀다.

▲ <찔레꽃> 노래비

그러면서 그녀는, “이 생명 다할 때까지 노래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녀가 1988년 생애 마지막으로 세상에 내놓은 앨범 <이별의 술잔>과 <백난아 히트 애창곡집>(1989, 현대음악출판사) ‘발간사’에서 얘기한 그녀의 ‘그리움’은, 그녀가 이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다 돼가는 지금은 살아남은 이들의 몫이 됐다.

- ‘그리운 세월 입니다. 풋복숭아같이 보숭보숭 하던 열 다섯살에 태평레코드사 전국콩쿠르에서 당선되어 전속가수가 된 뒤로 울고 웃던 무대생활이 어느 덧 47년 째라니…(중략)… 찬바람 불던 식민치하의 무대에서, 만세소리 드높던 해방의 무대에서, 포연이 자욱한 6.25의 무대에서 뜨겁게 뜨겁게 성원해 주시던 팬들의 박수소리 또한 잊을 수가 없습니다.…(중략…) 아직도 그리움이 많고 아직도 할 일이 많습니다. 팬들이 있고 무대가 있는 한, 이 생명 다할 때까지 노래할 것입니다.’
그녀가 노래로나 그리던 ‘남쪽나라 내 고향’ 제주 한림엔 지금 하얀 찔레꽃이 한창이다. 그녀가 태어난 명월리의 찔레꽃 노래비 공원에 가면, 언제나 그녀의 낭랑한 목소리에 실린 그녀의 풋풋한 혼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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