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옛날의 트로트- 노래의 고향을 찾아서

<5> 진방남의 <불효자는 웁니다>

▲ <불효자는 웁니다>앨범 재킷

스무살 총각의 ‘가수의 꿈’
노래 하나에도 자유가 불가능했던 시절-일제 때, 그 궁핍했던 시대에 큰 위안의 하나는 그래도 노래였다. 그리하여 그런 암울했던 시절이었음에도 1940년을 전후한 반도 조선은 ‘가요콩쿨 전성시대’를 구가했다. 이 가요콩쿨대회는, 이 땅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대중가요의 번성에 고무돼 목하 성업 중인 국내 레코드 회사들의 신인발굴과 신곡 홍보수단이 되는 절호의 연례행사로 일대 성황을 이뤘다. 저 함경도에서부터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산 넘고 물 건너 이 아마추어 가요제전에 수천 명이 응모해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대회가 열리는 사흘 밤낮은 온통 축제분위기였다.

경상남도 마산 합포 출신의 촌사람 박창오(진방남의 본명 : 1917~2012)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본래 소설가 지망생이었지만, 가정형편이 넉넉지 못해 학업을 중도에서 포기한 박창오는, 스무살 나던 해인 1936년 설레는 ‘가수의 꿈’을 안고 마산 집을 나섰다. 그때 늙으신 어머니가 마산역까지 배웅을 나와 눈가에 그렁그렁 맺히는 눈물을 거친 손등으로 연신 훔쳐댔다. 걱정 말고 들어가시라는 말 밖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것이 그가 마지막 본 어머니의 모습이 됐다.

그러나, 세상이 어디 그렇게 녹록하던가.
우선 당장의 밥벌이를 위해 알음알음으로 서울에 있는 한 양복점의 재단사 보조로 취직을 했다. 여전히 맘 속에 꽁꽁 쟁여놓은 ‘가수의 꿈’은 버리지 않은 채 기회가 오기 만을 기다렸다. 그러기를 2년. 드디어 그토록 기다리던 기회가 찾아왔다. 박창오는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1938년 봄, 조선일보사와 태평레코드사가 공동으로 주최한 노래콩쿨에 응모해 <북국 오천킬로>(이재호 작곡)라는 지정곡 외에 자유곡 <춘몽>이라는 노래로 당당히 1등을 차지했다. 그 길로 바로 태평레코드사의 전속가수가 됐다. 그의 나이 스물세살 때였다.

▲ <불효자는 웁니다>작곡가 이재호(1919~1960). 그는 일본 유학파 ‘천재 작곡가’로 당시 ‘한국의슈베르트’라고도 불렸다.

이때 그가 처음 받은 곡이 이재호(1919~ 1960)가 작곡하고 김영일(1915~?)이 노랫말을 쓴 <불효자는 웁니다> 였다. 작곡가 이재호는, 당시 우리 대중가요계 최고의 인기가수 자리에 올라 있던 백년설의 <나그네 설움><번지 없는 주막><대지의 항구> 등의 노래를 작곡한 최고의 히트곡 메이커였다. 작사가 김영일은, 일제시대 때 저 유명한 김두한과 종로에서 우리 조선상인들을 보호해 주는 일을 했었다는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로 <불효자는 웁니다> 이후 <찔레꽃>(1942, 백난아), <댄서의 순정>(1960, 박신자), <노랫가락 차차차>(1963, 황정자), <쌍고동 우는 항구>(1965, 은방울 자매), <일자상서>(1970, 김부자)등의 대중가요 노랫말과, <다람쥐><구두 발자욱> 등의 동요 노랫말로도 정평이 나 있는 작사가 였다. 진방남(秦芳男)이라는 가수 예명을 얻은 것도 이때다.

▲ 방송국 좌담프로에 출연한 진방남(맨 오른쪽). 맨 왼쪽이 노랫말을 지은 작사가 김영일, 가운데는 <찔레꽃>(1942)을 부른 가수 백난아.

당시 일본인이 사주였던 태평레코드사는 녹음 스튜디오 시설을 일본 오사카에 가지고 있어 <불효자는 웁니다> 녹음을 위해서는 일본으로 건너가야 했다.
이때 태평레코드사 전속가수인 백년설·신카나리아·고운봉·선우일선 등의 가수들 역시 녹음을 위해 동행이 됐다.

그런데,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진방남이 오사카 스튜디오에 도착하자 긴급 전보 한 통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친 별세> 전보였다. 고향 마산역을 떠날 때, 아들을 배웅하며 연신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시던 그 어머니가 돌아가시다니… 북받쳐 오르는 설움으로 목이 메인 진방남은 노래를 더이상 부르지 못하고 스튜디오를 박차고 나와 꺼이꺼이 소리내어 울었다. 스튜디오 안은 졸지에 눈물바다가 됐다. 결국 녹음은 그 다음날에야 겨우겨우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애써 삼켜가며 마칠 수 있었다.

애조 띤 단조로운 기타 반주에 맞춰 곧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울음을 입안 가득 문 것만 같은 서글픈 목소리로 나직나직 부르는 진방남의 노래는, 일제말기를 거쳐 6.25 전쟁 이후,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실향민들의 눈물주머니를 자극시키며 망향의 서러움을 되새김질 시키는 애달픈 사모곡(思母曲)이 됐다.

 

       

▲ 2015년 서울 장충체육관 특별무대에서 공연됐던 악극 <불효자는 웁니다>.(주인공 이덕화와 김영옥)

<불효자는 웁니다>

1. 불러봐도 울어봐도 못오실 어머님을
   원통해 불러보고 땅을 치며 통곡해요
   다시 못올 어머니여 불초한 이 자식은
   생전에 지은 죄를 엎드려 빕니다

2. 손발이 터지도록 피땀을 흘리시며
   못믿을 이 자식의 금의환향 바라시고
   고생하신 어머님이 드디어 이 세상을
   눈물로 가셨나요 그리운 어머니

3. 북망산 가시는 길 그리도 급하셔서
   이국에 우는 자식 내몰라라 하셨나요
   그리워라 어머님을 끝끝내 못뵈옵고
   산소에 엎푸러져 한없이 웁니다.

 

전해지는 또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3절의 노랫말 중 ‘이국에 우는 자식 내몰라라 하셨나요~’는 처음의 원가사가 ‘청산의 진흙으로 변하신 어머니여~’였던 것을 진방남 어머니 별세 전보를 받고 급히 지금의 가사로 바꿨다는 것이다.
   
 

▲ 진방남(반야월)의 만년 모습.

‘반야월’로 70여년간 3천여 곡 노랫말 남겨
특별히 빼어난 절창이라 느껴지지는 않지만, 끊어질 듯 이어지는 기타 멜로디며 노랫말과 곡조를 감정의 격함 없이 자근자근 곱씹듯 절절하게 이어가는 진방남의 가창은, 듣는 이들을 일순간 먹먹하게 만드는 흡인력이 있다. 제목만으로도 우린 모두가 어머니, 아니 부모님 앞에 불효자가 된다.
그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녹음을 마친 후인 1950년 1월, 백년설과 함께 진방남이 경성방송에 출연해 생방송으로 <불효자는 웁니다>를 불렀는데,이 방송을 들은 청취자들의 반응이 예상 외로 뜨거웠다. 아직 레코드 발매 2개월 전인데도 주문이 쇄도하면서 폭발적 히트를 기록했다.

진방남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 나도 이젠 유명가수가 됐어~ 그러나 어머니, 어머니는…’
이후 진방남은 인기가도를 달리며<꽃마차>(1942), <잘있거라 항구야>(1940) 등 100여곡의 노래를 불렀고, 1942년부터는 ‘반달’이란 뜻의 반야월(半夜月)이란 이름과 함께 추미림·박남포라는 예명으로 노랫말을 짓는데 전념했다. 반야월이란 이름으로 된 노래들 중 히트곡들을 대충 꼽아보면, <울고 넘는 박달재> (1950, 박재홍)·<단장의 미아리 고개>(1956, 이해연)·<산장의 여인>(1956, 권혜경)·<만리포 사랑>(1956, 박경원)·<무너진 사랑탑>(1958, 남인수)·<열아홉 순정>(1959, 이미자)·<유정천리>(1959, 박재홍)·<외나무 다리>(1962, 최무룡)·<두메산골>(1963, 배호)·<남성 넘버 원>(1963, 박경원)·<삼천포 아가씨>(1964, 은방울자매)·<아빠의 청춘>(1964, 오기택)·<소양강 처녀>(1970, 김태희) 등이고, 노랫말 짓기에 주력한 70여 년간 남긴 곡들이 무려 3000여 편에 달한다.

해서 당시 우리 가요계에서는, 작곡가 박시춘(1913~1996)·<목포의 눈물>의 가수 이난영(1916~1965)·작사가 반야월을 ‘가요계의 3보(三寶, 세 보물)’라고 일컫기도 했다.
그러나, 옥의 티라고나 할까. 지난 2010년에 1940년대 일제시대 전반에 일제의 침략전쟁을 칭송하는 군국가요 활동을 했던 친일행적이 사회적 이슈가 돼 ‘매우 후회스럽고 국민께 사과 드린다’며 공식적으로 대국민 사과표명을 하기도 했다.

‘스토리가 있는 노랫말’ 짓기에 관한한 우리 대중가요계에서 그 누구의 추종도 불허하던 ‘명인’의 반열에 우뚝 섰던 그는 가고 이제 우리 곁에 없지만, 그의 혼이 실린 노래들은 지금도 단장의 미아리 고개며 제천 박달재를 넘고, 해 저문 소양강의 붉은 노을이 돼 흐른다.

저작권자 © 농촌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