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주 전남여성가족재단 원장, 전국여성정책네트워크 회장

"코로나19는 인류가 1~2년 이내에
극복해낼 수 있는 전염병이지만
여성의 몸에 대한
폭력, 대상화, 노예화라는
성착취 범죄 바이러스는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바이러스다."

▲ 안경주 전남여성가족재단 원장, 전국여성정책네트워크 회장

텔레그램 n번방 사건과 같은 성착취범죄는 국내외 디지털 플랫폼의 기술적 고도화로 우리의 상상을 넘어선 악질성을 양산하고 있다. 인권을 짓밟고 여성을 성노예화한 26만여 남성들의 ‘놀이·게임’은 버닝썬, 김학의·김준기 사건을 잇는 디지털시대 성착취 강력범죄다. 그런데도 미온적 태도와 저형량·집행유예로 판결을 내린 성인지 감수성 제로 판사들의 보호 아래 이 강력범죄는 이제 우리 가정과 사회의 저변을 장악한 광범위한 사회적 범죄가 됐다.

이에 정부는 이를 반인륜적 강력범죄로 규정하고, 4월23일 9개 관계부처와 민간전문가로 구성된 민관합동 TF를 통해 정부 종합대책안인 ‘디지털 성범죄 근절대책’을 내놨다. 종합대책안은 2018년 하반기부터 텔레그램, 디스코드, 라인, 워커, 와이어 등의 메신저 앱을 이용해 피해자들을 유인·협박해 성착취물을 찍게 하고 이를 유포한 디지털 성범죄, 성착취 사건에 대한 근절대책이다.

‘처벌은 무겁게, 보호는 철저하게’를 모토로 준비된 대책안은 아동·청소년 이용 성착취물 범죄 처벌 상향·양형기준을 마련하고 성착취물 제작행위에 대한 공소시효를 폐지했으며, 미성년자 강간을 중대 범죄로 취급해, 준비하거나 모의만 해도 예비, 음모죄로 처벌되고 가해자의 신상공개 범위가 확대된다. 온라인 그루밍범죄 처벌을 신설하고 미성년자 의제강간 기준연령을 16세 미만으로 상향조정했으며, 성범죄물을 소지·구매한 때도 처벌하며, 잠입수사 도입과 범죄수익 환수를 위한 독립몰수제가 도입된다. 또한, 전 국민이 피해감시자로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신고포상금제’가 도입되며, 인터넷 사업자에게도 유통의 책임을 묻는 징벌적 과징금제도 추진된다.

텔레그램 n번방 사건에 대한 온 국민의 충격이 가해자뿐 아니라 피해자에 아동, 청소년이 많이 포함돼 있다는 점에 있었듯, 정부 대책안 역시 아동·청소년 보호에 많은 공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 최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오는 기괴한 사례들, 예를 들어, 생후 36개월 유아를 성폭행한 초등학생을 처벌해달라는 어느 어머니의 요구, 유치원에서 발생한 아동 간 성폭행 사건 등에 관한 처벌 청원들을 보면, 우리 사회에 일상이 되어버린 아동, 여성의 몸에 대한 범죄가 이제 모든 연령과 장소의 경계를 넘어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부의 이번 대책발표는 보통의 남성들이 집단으로 여성, 아동, 청소년의 몸을 착취하고 정신을 죽이면서 즐기는 것이 결코 취향이나 호기심이 아니라 인권을 유린한 중대 범죄라고 규정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강력한 처벌을 통해 인간의 성과 몸, 그리고 정신이 얼마나 존엄한 것이며,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이 다른 인간의 놀이 도구가 될 수 없음을, 그리고 돈벌이의 수단이 될 수 없음을 온 국민이 그리고 특별히 법조인들이 깨닫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더불어 성범죄가 젠더 관계에 기초한 성착취임에도 불구하고 아동과 미성년자에게만 집중하게 되면, 성인·노인·장애인·성소수자 등을 대상으로 하는 성범죄가 상대적으로 간과될 우려가 있다는 점도 인식해야 한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어 작동하는 성착취에는 전국적인 여성폭력 근절 운동을 벌여야 할 때다. 코로나19는 인류가 1~2년 이내에 극복해낼 수 있는 전염병이지만 여성의 몸에 대한 폭력, 대상화, 노예화라는 성착취 범죄 바이러스는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바이러스다. 코로나19 극복과정을 통해 보여준 국가 리더십과 국민적 단합력은 이제 코로나보다 훨씬 강력하게 인간의 정신과 몸을 파괴하는 전염병인 성착취 범죄를 종식하고 성평등 가치를 새롭게 세우는 대국민 운동으로 전개해야 한다.

저작권자 © 농촌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