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래의 고향을 찾아서

<3> 이난영의 사람들 - 남인수와 김시스터즈

▲ 2006년 3월 목포 대삼학도 1000여평 부지에 조성된 <가수 이난영 공원> 내 이난영 묘소 뒤편에서 본 묘역 전경. 목포 내항과 목포 앞바다가 그윽히 바라다 보인다. 아래 사진은 묘역 전경. 맨앞 입구 왼쪽에는 <목포의 눈물>노래비, 오른쪽에는 <목포는 항구다>노래비를 마치 수호석처럼 세웠다. 그러나, 지난 4월7일 사진촬영 당시 애초 수목장 때 ‘이난영 나무’로 명명된 목백일홍(배롱나무)이 관리부실 탓인지 말라죽어 있어 안타까움을 더해 줬다.

아, 꿈은 사라지고…남편의 납북
전쟁은, 가녀린 여자의 몸으로는 가누기 힘든 혹독한 고통을 안겨 주었다.
생활근거지며 안정을 찾아가던 삶이 한순간에 뿌리째 뽑혀 나갔다.
설상가상으로 6·25전쟁 직후 인민군을 피해 서울에서 숨어지내던 남편 김해송이 자신이 이끌던 케이 피 케이(KPK)악단 후배단원의 밀고로 인민군에게 잡혀갔다. 미8군 공연을 많이 했다는 게 이유였다.
이난영은 졸지에 잡혀간 남편을 만나보기 위해 남장으로 위장을 한 뒤 얼굴에 숯검정 칠을 하고 마음 졸이며 감금돼 있다는 서대문형무소 언저리를 몇날며칠 맴돌았으나 허사였다.

그것으로 남편 김해송과 이승에서의 인연은 끝이었다. 훗날 전해진 바로는, 미아리고개를 넘어서 북으로 끌려가다가 동두천 부근에서 폭격으로 사망했다고 하기도 했고, 북으로 끌려간 뒤인 1950년대 중반에 원산의 한 요양원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고 하기도 했다.
김해송이 결혼기념으로 작곡해 이난영에게 부르게 했던 스윙재즈 스타일의 블루스곡 <다방의 푸른 꿈>처럼, 이난영의 ‘푸른 꿈’은 하루아침에 산산조각이 나 흩어지고 그리움으로 남았다.

 

                  <다방의 푸른 꿈>

내뿜는 담배연기 끝에 / 흐미한 옛추억이 풀린다 / 고요한 찻집에서 커피를 마시면/ 가만히 부른다 그리운 옛날을 / 부르누나 부르누나 /흘러간 꿈을 찾을 길 없어 / 연기를 따라 헤매는 마음 / 사랑은 가고 추억은 슬퍼 / 블루스에 나는 운다 / 내뿜는 담배연기 끝에 / 흐미한 옛추억이 풀린다 //
조우는 푸른 등불 아래 / 흘러간 그날 밤이 새롭다 / 조그만 찻집에서 만나던 그날 밤 / 목 미어 부른다 그리운 그 밤을 /부르누나 부르누나 / 서리에 시든 장미화러냐 / 시들은 사랑 쓰러진 그 밤 /그대는 가고 나 혼자 슬퍼 / 블루스에 나는 운다 // 조우는 푸른 등불 아래 / 흘러간 그날 밤이 새롭다

                                                                                (1939,  조명암 작사 / 김해송 작곡)


다시 식구들의 ‘밥’을 걱정해야 했다. 그냥 모든 걸 포기하고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노래만으로 다시 살아야 했다.
그녀는 정신을 수습한 다음 독하게 이를 앙다물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리고 오빠 이봉룡과 함께 남편이 운영하던 케이 피 케이(KPK)악극단을 정비해 ‘이난영 악단’으로 이름을 바꾸고 손수 운영을 떠맡았다.
다행히도 일제의 말기적인 갖가지 제재와 압박, 통제의 강화에도 불구하고 트로트 형식으로 다듬어진 우리의 대중가요가 양적 발전을 이루면서, 이어진 혼란스러운 해방공간 속에서도 다양하면서도 풍성하게 꽃을 피워가고 있었다.

백년설의 3대 히트곡인 <나그네 설움>(1940)·<번지 없는 주막>(1940)·<대지의 항구>(1941), 고운봉의 <선창>(1941), 진방남의 <불효자는 웁니다>(1940), 고복수의 <짝사랑>(1937), 김정구의 <바다의 교향시>(1938),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1938), 황금심의 <알뜰한 당신>(1938), 백난아의 <찔레꽃>(1943), 이인권의 <귀국선>(1945), 현인의 <신라의 달밤>(1947), 박재홍의 <울고 넘는 박달재>(1950)… 등등. 당시 일반 서민들은 서민들대로 비록 유성기는 없었지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구성진 노래의 가사를 받아적으며 소위 자신의 ‘십팔번’으로 가슴에 새겨놓고, 삶이 팍팍하고 힘들 때마다 목청껏 불러대며 마음의 위안을 삼았던 것이다.

이난영은 어려운 피난살이 속에서도 남편 김해송이 했던 것처럼 자신의 이름을 붙인 악단 운영과 노래에 온 힘을 쏟았다.
순회·위문공연이며, 미8군 클럽 무대 출연 등으로 잠시도 쉴 새 없었지만, 그런 한편으로 자신의 존재이유이기도 한 일곱남매 아이들을 강하게 (특히 음악방면으로) 조련시켜 나갔다.
말더듬이처럼 시작한 팝송은 물론이고, 서양악기며 심지어는 농악과 춤에 이르기까지 둥지 속 새끼 기르듯 독하게 하루 5시간씩 피나는 연습을 시켰다는 것이다. 그런 훈련 덕에 뒷날 김시스터즈와 김보이즈는 무려 13가지의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재간꾼들이 됐다.

시인 고은이 연작시 <만인보>에서 당시의 이난영이 처한 상황을 이렇게 압축해 그렸다.
ㅡ ‘남편 김해송이 북에 납치 되었다 / 납치된 자의 가족조차 / 반공세상에 어긋났다 / 남편이 경영하던 / KPK(케이 피 케이) 쇼단도 해체 당했다 // 어린 다섯남매의 엄마 이난영 //  딸들 /숙자 애자 그리고 조카 민자로 / ‘김시스터즈’를 만들어 미8군 무대 환호성을 차지했다 / ‘김보이즈’ 영조 상호 태성으로 / 미8군 무대 박수갈채를 받았다 // 시스터즈 / 보이즈 미국으로 갔다 // 엄마 이난영 가지 않았다’

‘김시스터즈’는 당초부터 엄마 이난영의 주선으로 주로 미8군 클럽 무대에서 활동했는데, ‘춤추고 노래하고 자유자재로 여러 악기를 연주하는 10대 소녀들’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미국 연예사업가의 주선으로 1959년 1월 미국 진출이 성사됐다. 미국에서는 뉴욕에 머물면서 네바다주 최대 관광도시인 라스베이거스를 주무대로 공연활동을 했다. 당시 영국의 4인조 밴드-비틀즈의 미국 진출 교두보가 됐던 <에드 설리번 쇼>에 무려 22회나 출연해, 세계적인 인기 그룹으로 떠오른 김시스터즈의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톱스타 ‘걸그룹’ 밴드로 승승장구 할 무렵인 1970년 6월5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첫 내한공연을 가진 이래 1975년, 1980년 두 차례 더 내한공연을 가진 바 있는데, <김치깍두기>, <찰리 브라운>, <할레루야> 등의 히트곡이 있다.
이난영은 딸들에게, “미국에서 성공하기 전에는 절대 돌아오지 말라!” 하고는 돌아서서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런 어머니가 안쓰러워 딸들이 미국에서 함께 살기를 원했으나, 1년도 채 못돼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1963년의 일로, 그녀가 세상 떠나기 2년 전의 얘기다.

▲ 이난영의 무릎을 베고 세상을 떠난 ‘가수의 황제’ 남인수. 그 무렵 두 사람은 함께 살았다.

마지막 연인… ‘가황(歌皇)’ 남인수
그도 그럴 것이, 그때 이난영은 당시 가요계 황제- ‘가황’으로 불리고 있던 남인수와 사실혼 관계로 동거생활을 하고 있었다. 6.25전쟁 통에 남편 김해송이 돌연 납북돼 사망하자, 이난영은 한동안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고독과 절망 속에서 술과 담배, 그리고 마약에 빠져들었다. 특히 가난한 어린시절부터 앓아온 심한 위경련으로 고생했는데, 그럴 때마다 남편 김해송이 아편을 처방해줘 통증을 가라앉히곤 해 이미 마약중독이 돼 있었다. 남인수는 그런 이난영이 안쓰러웠던 것이다.

애초 이난영과 남인수의 인연은 1934년 목포가요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이난영은 18세. 16세로 두 살 아래인 남인수의 누나뻘이었으나, 아마도 이때부터 은근히 연정을 느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런 마당에 이난영이 홀로 되자 악단 일이며 생활·경제적인 면을 거들어 주며 보살피다가 연인관계로 발전한 것이다. 물론 남인수는 어엿한 부인과 2남2녀의 자식들이 있는 기혼자의 몸이었다. 그럼에도 그렇게 살갑게 대해주는 남인수가 이난영 역시 싫지 않았다. 더욱이나 남인수가 폐결핵 중증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고, 지극정성으로 병수발을 해 주면서 부부 이상의 정을 나누며 함께 지냈던 것이다.

결국 남인수는 1958년, 당시 한국무용가였던 부인 김은하(한때 이난영 남편인 김해송과 연인관계였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와 이혼한 뒤 그 4년 뒤인 1962년, 4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마지막 떠날 때는 이난영이 곁에 있었다.
남인수가 마지막 떠나던 날, 이난영의 무릎을 베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노래 한 곡을 불러달라고 청하자, 이난영이 남인수의 출세곡이자 대표히트곡인 <애수의 소야곡>을 나직이 불러주면서 흐느껴 울었다고 전한다.

 

                  <애수의 소야곡>

1.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요만은 /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
     고요히 창을 열고 별빛을 보면 / 그 누가 불러주나 휘파람 소리

2. 차라리 잊으리라 맹세 하건만/ 못잊을 미련인가 생각하는 밤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감으면 / 애타는 숨결마저 싸늘 하구나

3. 무엇이 사랑이고 청춘이던고/ 모도다 흘러가면 덧없건 만은
    외로운 별을 안고 밤을 세우면/ 바람도 문풍지에 싸늘 하고나

                                              (1938, 이부풍 작사 / 박시춘 작곡 )

▲ 정면에서 본 이난영 묘소

그렇게 가슴 아리게 연인 남인수를 떠나보낸 이난영은, “남인수야말로 나를 진짜 여자로 만들어 준 유일한 남자”라며 애석해 하며 눈물지었다고 한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이난영은 서울 중구 회현동의 옛집에 혼자 살며 이따금 집에서 가까운 명동 카나리아 다방(가수 신카나리아가 운영)에 들러 옛 동료들을 만나곤 하기도 했다. 그리고는 여전히 텅빈 집에 덩그러니 홀로 나앉아 외로움에 떨면서 술·담배·아편에 흠씬 젖어들었다.

그러길 여러 날… 결국 1965년 한창 봄날인 4월11일, 49세의 시퍼런 나이에 빈 방에서 홀로 쓸쓸히 고단한 삶을 훌훌 털고 저세상으로 갔다.(일설에는, 아편중독에 의한 심장마비사 라고 하기도 하고, 방안 시신 옆에 빈 술병이 뒹굴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음독자살 했다는 얘기도 있다.)

장례는 한국연예인협회장으로 치른 뒤 경기도 파주시 용미리 공동묘지에 매장됐다가 세상 떠난 지 41년 만인 2006년3월, 유달산과 목포 앞바다가 바라다보이는 대삼학도 난영공원으로  이장해 수목장으로 모셔져, 그토록 그리던 고향에서 영원한 안식에 들었다. 국내 최초의 ‘대중가요 노래비’인 <목포의 눈물> 노래비(높이 211cm×넓이 247cm)는, 1969년 6월11일, 한 목포시민의 출연금으로 유달산 중턱에 세워진 것이어서 그 의미가 깊다.

그녀가 50도 안되는 짧은 생애동안 남긴 500여 곡의 노래들은, 후세 사람들의 가슴에 지울수 없는 낙화(烙畵)처럼 새겨져 그리운 넋그림자로 떠돈다.
지금 목포 -유달산·삼학도 난영공원에 가면, 하루종일 처연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이난영의 혼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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