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나물은 화수분 같이
자고나면 더 넘치게
출렁거려 입맛 돋운다"

일기예보대로 목마른 대지 위에 밤새 금비가 내렸다. 봄비에 닿은 앞산은 연둣빛 새순으로 컬이 굵은 파마머리를 한 듯 몽글몽글 부풀어 오르고 흐르는 강물조차 청록빛으로 푸르다. 오랜만에 촉촉해진 부드러운 흙을 밟으며 들판의 농부는 일손이 바쁘다. 씨앗을 묻고 땅을 갈아엎어 멀칭을 하고 담배, 옥수수, 배추 모종 심기에 정신없다. 우리도 아침부터 농원 여기저기 뻗어 자란 오가피를 캐내 옮겨 심고, 화단의 종지나물은 울타리 쪽으로, 밭에 마구 자란 돌미나리는 미나리꽝으로 옮겨 심으며 식(초)목 행사로 분주하다.

산에서 내린 골짝물이 집 뒤안에 고여 조그만 웅덩이를 만들었는데, 남편이 이사 초기에 낚은 민물고기를 키운다고 연못같이 만들었다가 내버려둬 바닥에 흙과 모래와 낙엽 등이 쌓여 그곳이 미나리 자생지가 됐다. 우리는 거기를 미나리꽝이라 부른다. 돌미나리를 캐다 심느라 호미로 웅덩이의 뻘과 낙엽을 걷어내니 뭉클한 촉감에 투명한 비닐 줄기 안에 까맣게 점점이 박힌 것이 줄줄이 서로 얼크러져 잠겨 있다. 순간 놀래 소리쳤더니 남편이 “도롱뇽 알집”이라며 물이 깨끗한 탓이고, 아직 여긴 살만한 곳이라 으쓱한다.

그러고 보면 물은 생명이다. 깊은 산골짝 물줄기로부터 시작해 배밭 둑을 지나 강가에 이르기까지 그 주변으로 머위를 키워내고, 그 곁으로 참나물이 퍼져 자란다. 뒷담 위 좁은 텃밭엔 곤드레가 잎을 올리고 산에서 캐다 심은 취나물도 어린싹을 낸다. 빈 밭에는 망초싹도 여기저기 자리를 잡았다. 뒷담에 줄 세워 둔 참나무에 거북이 등처럼 갈라진 백화표고가 꽃처럼 피고, 담 아래 돌나물이 이끼처럼 새파랗게 길을 메우며 건너 편 양지엔 부추가 두어줄 자라 있다. 쑥이며 민들레, 방아싹도 자유롭게 자라고 있다.

올 봄에는 비가 참 귀했다. 필요한 때 곡우에 내려 농사에 좋았지만 비 오고나면 북쪽에서 찬바람이 내려와 일부 내륙엔 영하권에 든다 한다. 겨우내 푹했던 날씨가 왜 4월 봄에 서리서리 내리는 지. 주인을 잃은 봄인가? 반겨주는 이 없어 뒷걸음질 치고 있는가? 철없이 달려드는 봄꽃 사이로 다퉈 피던 자둣꽃, 복숭아꽃, 배꽃 모두 냉해를 입어 올해는 열매보기 어렵다는데, 우리가 농사짓기 시작해서 배꽃까지 냉해를 입는 것은 올해가 처음이라 남편도 어찌할 바를 모른다.

요즘은 내일에 대한 아무런 기대를 할 수가 없다. 최근 여러 해 동안 잦은 기후변동으로 농원에서 배를 제대로 수확하지 못했다. 오히려 집을 둘러싸고 있는 텃밭과 개울, 산울타리와 기슭에서 일용할 양식을 얻는다. 오늘은 작년에 보내지 못했던 두릅 순을 따서 먼저 시누이께 보내드렸다. 이 봄을 몇 번이나 더 맞을지 모르는 인생의 황혼기에서 더 소원해지지 않도록 서로의 온기를 내어주는 손이 더 절실하다.  

나물은 뜯어도 뜯어도 화수분 같이 자고 나면 다시 더 넘치게 출렁거리고 때가 되면 어김없이 솟아 나와 입맛을 돋운다. 과수원의 배보다 자연나물, 산나물이 요사이 우리집 주인공이다. 이곳에 온 지도 15년을 넘기고 보니 달래, 냉이, 쑥은 기본이고 머위나 오가피순, 참나물, 미나리나 두릅, 엄나무순, 취, 곤드레 등 우리 가족이 먹고도 많이 남아 도시 사는 친구, 형제, 이웃들과 나누고 있다. 사고팔던 예전의 장사가 아니라 주고받는 일에 더 열심이다. 그저 보잘 것 없는 봄나물 한 봉지에도 휴대폰에 불이 난다. 그래서 나는 늘 되로 주고 말로 받고 있다. 보낸다는 말만 듣고도 “아! 따뜻한 마음, 그 동네 살고 싶네.” 친구의 문자메시지 한통이 맘 속 생명의 꽃 한 송이를 환하게 피워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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