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흐르는 시간을 쓴다는 것
붙들고 싶은 사람이 된 것
아버지가 주신 기억 덕…

맨 처음의 기억은 초등학교 때인가 보다. 초봄 새학기가 되고 새 교과서를 받아오면 지나간 달력종이를 뜯어 아버지는 책꺼풀을 싸주셨다. 그리고 나면 나를 데리고 문방구에 가서 과목마다 공책을 고르고 거기에 일 년치 몫으로 일기장도 네댓 권을 사 주셨다.
나는 그렇게 글쓰기와 가까워졌다. 특별히 일기를 쓰는 방법이나 내용을 배운 일은 없지만 그냥 끄적이고 그림도 그렸다. 뭘 써야하는지 잘 모른 채로 쓸게 없으면 없는 대로 낙서 같은 것을 써댔지만 어느덧 그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것으로 자리 잡았다.

중·고등학교 시절 한참 독서에 빠진 내게 아버지는 세계문학전집을 한 질 사주셨고, 나의 일기는 거의 독후감으로 채워졌었다. 서울에서 자취를 하며 대학생활을 할 때도, 부산에 내려가 교편생활을 할 때도 며칠에 한 번씩은 드문드문이라도 메모처럼 글을 남겼다. 그것은 나와의 소통, 내 생각과 느낌을 써 나가며 나를 정리해 내는 방법이기도 했다.
꽁꽁 숨겨둔 자아에 대한 기록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지나치게 감성적이어서 어디에서도 말 못할 내용이 대부분이라, 일기장 속에서 스스로 존재를 만났고 세상의 한복판에서 방황하며 자신을 이해하고 적응하려는 내 젊은 날의 몸부림이었다. 일기를 통해 자기를 객관화하고 삶을 배우는 일, 아무도 모르는 시간이 다시 볼 수 있는 형태로 보존되고 간직되는 일, 일기를 쓰는 이유가 가치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요즘 내 일기의 가장 많이 등장하는 글은 ‘몸’이다. 작년엔 병원에 다니면서 의사 선생님에게 체중을 조절하라는 권고를 자주 들었다. 나이 들면서 혈압, 경계성 당뇨, 중성지방, 골다공증 등 온갖 병이 와서 붙는다. 의사선생님은 매일 야채 한 접시를 먹고 기름진 것을 피하라고 메뉴까지 짜주신다.
결혼하고 아이를 출산한 이후로 체중이 15㎏이나 불었다. 뚱뚱하다는 생각 때문에 다이어트에 대한 강박이 늘 있어서 살만 빼면 된다는 생각에 몸을 가혹하게 다뤘다.

살 빼는 일에 급급해도 ‘몸’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보잘 것 없는 몸을 위해 돈을 버는 일이나, 더 나은 일을 포기하는 것을 어리석은 일로 여겼던 나는 이제와 몸이 병들고 나니 몸의 건강이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 일인가를 절실히 깨닫는다. 날씬해진다면 몸이야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 것을 깊이 반성하면서 몸의 일기를 쓴다. 가장 나의 근본이 되는 몸, 그리고 물질적인 기반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으로 일기를 쓰며 내 ‘몸’에 대해 화해를 청하고 있다. 

어제 저녁으로 호박죽 한 그릇 먹고 잤더니 아침에 고추장에 구운 돼지고기 향기를 이기지 못하고 두어 점 먹고 그 반성으로 쓰디쓴 여주차를 한 사발 들이킨다. 이렇게 내가 먹고 있는 것들을 꾸준히 기록하면서 자기성찰을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흘러가는 시간을 쓴다는 것을 통해 붙들고 싶은 사람이 된 것은 아주 옛날 아버지가 내게 주신 선물의 기억 덕이리라. 창 밖에는 모처럼 눈다운 눈이 천지를 뽀얗게 뒤덮고 있다.

저작권자 © 농촌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