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칼럼 - 누리백경(百景)(125)

# 묵은 해가 가고 새해가 오는 어수선함 속에서 재계 1·2세대의 연이은 별세소식을 접하는 마음이 왠지 애잔하다. 지난해 12월9일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83세로 작고한데 이어 12월14일엔 구자경 엘지(LG)그룹 명예회장이 94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가 하면 롯데그룹 창업주인 신격호 명예회장이 신년 1월19일 99세로 별세했다. 특히 신격호 명예회장은 삼성그룹의 이병철(1910년생), 현대그룹의 정주영(1915년생) 회장에 이어 ‘맨주먹으로 기업을 일군’ 이 땅의 1세대 기업인 최후 생존자였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말- ‘도전’과 ‘열정’으로 롯데를 자산 115조원의 글로벌 기업으로 키웠다.
그의 타계로 ‘신화시대’와도 같았던 ‘창업 1세대 경영인 시대’가 막을 내렸다.

# ‘세계 경영’을 기치로 내걸고 자본금 500만 원으로 시작한 대우실업을 30년 만인 1998년 41개 계열사와 396개의 해외법인을 거느린 재계 서열 2위 기업으로 키운 김우중 회장은, 말년이 평탄치 않았다. 전 정권 때 영어의 몸이 되기도 했던 그는, 말년엔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에 머물며 글로벌 청년인재 양성에 남은 힘을 쏟았다. “젊은 사람들에게 있는 재산 물려주는 것보다 성취, 일의 가치를 알게 해주는 게 더 소중하다. 기회가 많은데 작은 무대에서 아등바등 하지 말고 큰 무대에서 크게 생각하라”며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던 그의 생전의 말이 큰 울림으로 가슴을 친다.

구자경 LG명예회장은, 연암 구인회 엘지 창업회장의 장남으로 1970년부터 25년간 엘지그룹을 이끈 2대 회장이다. 우리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저 옛날(?)의 ‘럭키치약’, ‘금성TV’라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개발상품을 내놓은 장본인이다. “고생을 모르는 사람은 칼날 없는 칼이나 다름없다”는 선대 회장(아버지)의 철학을 가슴에 담고, ‘땅은 작아도 기술만은 대국인 나라’를 꿈꾸며 ‘고객 위한 가치창조와 인간 존중 경영’을 경영이념으로 삼았다. 그는 일흔살에 큰아들(고 구본무 회장)에게 회사를 물려주고, 천안의 농장에서 콩을 재배하고 된장을 만드는 ‘시골농부’의 모습으로 24년을 살다가 세상을 떴다. 장례는 그의 뜻에 따라 ‘비공개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 주어진 운명-죽음은,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부러워하는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재벌이라도 비켜가지는 못했다. 기업의 제1의 목표는 더말할 것도 없이 ‘이윤 극대화’지만, 허구 많은 이 땅의 기업인들 중에서 이들이 각별하게 생각되는 건, 이들은 ‘기업보국(報國)’의 정신을 가지고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토대를 만들고 다진, 넓은 의미의 ‘국가 건설자들’이라는 데에 있다. 일부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재벌=착취’와는 거리가 멀게 살아온 이들이다. 이들은 진정으로 척박한 이 땅의 미래세대들에게 원대한 꿈과 희망을 주던 거목들 이었다. 조용하게 이승에서의 고단했던 나래를 접고 떠난 이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절로 숙연해지는 맘 금할 길 없다.

아, 우리는 어디서 무엇이 돼 다시 만나랴…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 다시 만나랴.’
-김광섭 (1904~1977), 시 <저녁에> (1975·<창작과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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