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일 심농(心農)교육원 원장

"옛 것을 본받아
새로움을 창조하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자세로
수지맞는 농사가 되도록 해보자"

▲ 박영일 심농(心農)교육원 원장

얼마 전 필자는 농업직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다산 정약용의 농업사랑’이란 주제로 강의했다. 다산 선생은 조선후기 실학정신을 바탕으로 국가개혁 사상가로 중농학파로 농업정책에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봉건적 형태의 토지제도 타파를 위해 농사짓는 농부가 농지를 가져야 한다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을 내세워 토지제도를 과감히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농본주의 씨앗이 뿌려져 오늘날 헌법상 경자유전 조문을 반영하는 등 그 맥이 이어져왔다고 볼 수도 있다.

다산 선생이 직접 정조대왕에게 제시한 것 중 하나가 바로 ‘3농정책’이다. 당시 핍박한 농민들의 삶을 해결하기 위해서 ‘후농(厚農)’ ‘편농(便農)’ ‘상농(上農)’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3농(農)’은 곧 수지맞는 농사가 돼야 하고, 편리한 영농이 돼야 하며, 그리고 농민의 사회적 위상을 높여야 한다.
다산 선생은 늘 부국강병이 되는 나라를 꿈꾸며 권농사상을 중요시해왔다. 책 만권을 읽어도 농사를 짓지 못하면 가난은 극복할 수 없으며,배고픔을 막기 위해서 정작 필요한 것은 두 뙈기밭이 필요하단 것이다.

배가 고픈 종이 남의 농장의 호박을 훔친 사건에 대해 다산 선생이 쓴 시(詩)를 보면 기가 막힐 정도로 가난의 아픔이 얼마나 큰지 잘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3농정책’ 중에서도 무엇보다 ‘후농(厚農)’을 많이 강조하고 있다. 결론은 농사를 지어서 수지가 맞도록 해야 한다.
다산 선생은 오랫동안의 유배생활 중에서도 고향에서 농사짓고 있는 두 아들에게 ‘경영형 부농(富農)’을 일구라고 신신 당부했다. 소득 높은 경제작물 재배를 권한다. 당시는 양잠업이 성행했는데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치면 꽤 소득이 됐다. 그래서 다산은 뽕나무 365 그루를 심으면 매년 365일을 손에 넣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즉 뽕나무 한그루는 하루의 삶을 보장해주기 때문에 일 년을 편안히 살 수 있게 된다는 얘기이다.

또 다산은 ‘처(妻)가 게으른 것은 패가의 근본’이라며 봄여름에는 누에를 쳐 명주를 짜게 하며 가을겨울에는 포목을 짜서 팔면 곳간에 양식이 가득해진다고 말한다. 당시 베틀로 명주를 짜는 것은 주로 여성들이 하는 작업이기에 가계경영에 여성의 역할이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
또 다산 선생은 농가소득 증대를 위해 상업농정책을 지향하면서 특용작물 재배, 복합영농, 집약농업의 경영을 주장한다. 농부가 벼나 보리를 기르는 본업에 힘쓰는 것은 기본이지만, 부업으로 과일·채소·약초·인삼·목축·양어·양잠을 권했다. 원래 농사는 이익이 박한 것이라고 하면서, ‘시골에 살면서 과수원이나 채소밭을 가꾸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버림받는 일이 될 것’이라고도 말했다. 또 토양을 효율적으로 이용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담배나 차 등 기호작물은 평야에 심지 말고 산지에 심으라고 권했다.

특히 다산 선생은 과학영농을 강조하며, ‘지극히 정밀한 것은 농사의 이치(之精者農理)’이므로 작물생리 파악의 중요성을 말했다. 그는 아들에게 작물재배의 경험을 토대로 저술도 함께 남기는 게 좋겠다고 권했다. 그리고 국가에서 농업기술도입 및 개발을 담당하는 ‘이용감(利用監)’설치를 주장했다. 이는 오늘날 시·군농업기술센터 설치의 정신적 모태라 볼 수 있다.
이처럼 다산 선생은 생명산업의 중요성을 뼛속 깊이 각인하며 실사구시적 농정구현과 부자농부가 돼야 한다는 절절한 마음을 그의 저술문집인 ‘여유당전서’에서 생생히 녹아내고 있다. 옛 것을 본받아 새로움을 창조하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자세로 수지맞는 농사가 되도록 더욱 노력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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