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굼뜬 나를 버려둔 채
황급히 떠나야만 하는가
겨울을 맞기에는 아직...

새벽하늘에 새삼스레 아라비안나이트의 비수처럼 가늘게 휜 손톱 달이 떠있다. 낙엽이 차 앞 유리에 수북이 쌓여 여기저기 무늬를 박았다. 창백한 아침 창고 지붕 위로, 마당 풀섶마다 하얗게 서리꽃이 피었다. 오늘은 어떠한가? 가을도 겨울도 아닌 계절에 그리운 안부를 묻는다.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버리기에는 차마 아까운 시간입니다./ 어디선가 서리맞은 어린 장미 한 송이(중략)/ 낮이 조금 더 짧아졌습니다./ 더욱 그대를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나태주의 시 <11월>처럼 낮도 저녁도 아닌 시간, 너무 와버렸지만 놓을 수 없는 계절. 굼뜬 나를 버려둔 채 황급히 떠나야만 하는가. 겨울을 맞기에 아직 철이 덜든 나인데 말이다.
허리 협착이 심해서 서울로 병원을 다니다보니 노박 딸네 집에서 며칠씩 신세를 질 수 없어 병원 가까운 곳에 방을 하나 구했고, 농원의 일이 거의 끝나가 일주일의 절반을 나눠 살아 보기로 했다.

막 수리를 끝낸 빈 아파트라 우리는 슬리핑백에서부터 옷가방, 취사도구, 세면도구, 비상식량 등등 피난민 살림살이같이 차에 가득 싣고 서울로 떠난다. 도로를 달리다 요철을 만날 때 뭔가 쩔그렁 소리가 나면 다른 차에도 들릴까 탈옥수처럼 맘이 조마조마하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다시 살아보는 일은 새로운 기회다. 비록 아파서 병원을 다니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여정이지만 모처럼만에 느끼는 설렘과 자유로움이 있다.

약속 시간에 맞춰 병원을 갔다 오면 종일 마음대로다. 나는 며칠 전에 종방된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보지 못했던 부분을 다시 보기를 했다. 처음엔 제목부터 올드한 것이 생활밀착형 치정로맨스라는 선전문구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공효진 얼굴은 옛날 극장 간판 그림 같았다. 그러다 시간이 나면 채널을 돌리다 한 번씩 본 것이 맘에 들었고, 그때부터 챙기기 시작했지만 놓친 부분이 많았다.

드라마에서 제일 매력적인 것이 대사다. 동백이네에서 더부살이 하던 ‘향미’는 “나는 오늘 너무 후달린다. 내손 좀 잡아줘 필구야. 너는 나의 보조밧데리 충전 좀 해줘.”라고 말한다.  ‘후달린다’는 말이 귀에 쏙 들어왔다. 철없는 진상 노규태는 변호사 홍자영에게 “네 친구가 다 검사 변호사인데 왜 나를 택했냐?”고 묻자 “너를 만나면 맘이 편해. 너는 행간이 없는 사람이잖아.”라고 답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태도와 사회적인 편견을 깨고 자기감정에 솔직하고 충실한 말은 매력이 넘쳤다.

지독한 가난에 못 이겨 딸을 고아원에 버리고 평생 딸을 몰래 지켜보다 병들어 죽게 될 상황이 되자 생명보험금을 주려고 딸 앞에 나타난 엄마의 모정은 우리 모두를 울렸다. 동백이 아들 필구도 철이 너무 빨리 들어 지 엄마 결혼에 방해가 될까봐 아빠한테 가서 살겠다고 고집을 부리고는 아빠집에서 맘고생을 자처한다.

동백에게 첫눈에 반한 용식이는 건강하고 저돌적인 직구를 날리고 동백이 주변을 맴돌며 일편단심 사랑한다. 찰진 사투리로 극강의 순박함과 뜨거움, 동백을 향한 용식의 전폭적인 순정이 너무도 싱싱했다. 자극적이고 과장스러운 악역 없이 보통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이 얼마나 행복하고 소중한 것인가를 일깨워 주는 따뜻한 이야기였다. 밤새 두루마기 휴지 한통을 콧물로 눈물로 찍어내는 동안 어느새 희미하게 여명은 밝아온다. 쓸쓸한 이 계절에 모처럼 참 훈훈하고 행복한 드라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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