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칼럼 - 누리백경(百景)(116)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에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며 ‘만인의 연인’으로 불리던 톱여배우 윤정희(尹靜姬•75) 씨가 10년째 심각한 알츠하이머 증상으로 프랑스 파리 근교에서 요양•투병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사실은 남편인 피아니스트 백건우(73) 씨와 바이올리니스트인 딸 진희(43) 씨가 국내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밝혔다. 백씨는, 아내 윤정희 씨의 안타까운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연주여행을 같이 다니면, 계속 바뀌는 환경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자신이 있는) 여기가 뉴욕인지, 파리인지, 서울인지… 연주복을 싸서 공연장으로 가는데, ‘우리가 왜 가고 있느냐?’고 묻는 식이다. 도착하면 또 잊어버린다. ‘여기서 뭐 하는 거냐?’고 묻고, 무대에  올라가야 한다고 하면, ‘앙코르는 뭘 칠거냐?’ 묻는다. 그렇게 무대에 올라가기까지 한 100번은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집에서) 아침에 밥 먹고 치우고 나면, 다시 밥 먹자고 한다. 딸(진희)을 봐도 자신의 막내동생과 분간을 못한다.”

곁에서 그런 배우 엄마를 돌보는 딸 진희 씨는 간절한 바람도 얘기했다.
“요새도 가끔 물어본다. ‘아빠가 어디 갔느냐?’고. 연주여행 갔다고 하면, ‘함께 가야 한다’며 빨리 택시를 부르라고 한다. 그리고, ‘오늘 촬영은 몇시야?’ 하고 묻는다. 그럴 정도로 배우로 오래 산 엄마를 많이 사랑해 준 사람들이 엄마에게 사랑의 편지를 많이 보내줬으면 좋겠다. 엄마가 그 사랑을 확인할 수 있게…”

1944년생이니까 올해 만 75세다. 본명이 손미자(孫美子)로 부산에서 출생해 전남 광주에서 성장한 윤정희가 배우로 데뷔한 건, 1967년 김내성(金來成, 1909~1957) 원작, 강대진 감독의 영화<청춘극장(靑春劇場, Sorrowful Youth)>을 통해서였다. 당시 합동영화사가 이미 1959년 홍성기 감독에 의해 김지미를 주연으로 해서 제작했던 흑백영화 <청춘극장>을 컬러로 다시 제작하기로 하고, 극중 여주인공(오유경)역을 공모했는데, 이때 무려 2,000대 1의 경쟁을 뚫고 당시 23세의 윤정희가 발탁되기에 이른 것이다. 상대 배역은 30세의 고 신성일. 당시 광화문 네거리에 자리하고 있던 국제극장의 ‘신정 특선프로’로 개봉됐는데, 입장을 기다리는 관객의 줄이 네 바퀴를 돌 정도로 3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최고 흥행을 거뒀다. 이로부터 윤정희는 영화 <흑맥>의 문희, <유정>의 고 남정임과 함께 ‘한국영화 (여배우)트로이카 시대’를 열었다.

“옷은 안 벗는다”는 신념으로 평생 32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은퇴를 생각해 본 적 없다. 90대가 되어서도 매력 있는 역할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던 그의 생체시계는, 지금 10년 전 예순다섯 살에 멈춰서버렸다. 지나간 세월동안 휘황한 카메라 플래시 속에서 평생을 수많은 타인의 인생을 연기해 온 여배우에게 있어서 삶이란, 세월이란 무엇이고,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아뜩해지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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