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칼럼 - 누리백경(百景)(111)

지나간 몇 십년 전 얘기다. 생전의 아버지께서는 자식들에게 쏟는 정이 남달랐다. 모내기 철이나 벼베기 철이 되면, 여러 구간의 논 중에서 마지막 남은 서마지기 반(약 700평)짜리 다랑이 논 만은 꼭 일꾼 품을 사지 않고 서울 유학 중인 아들들까지 모두 불러내려 오남매 자식들과 함께 찰방찰방 모내기며 벼베기를 하셨다. 노동으로서의 일이 아니라 재미처럼. 새끼들 먹일 새참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잰 걸음걸이로 후여후여 들에 나오시는 어머니의 얼굴표정이 이때처럼 행복해 보인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가세가 기울어 허리가 꺾여가면서도 그렇게 모심기를 하듯 자식들 ‘머리농사’에 올인 하셨다. “뉘집 딸은 국민핵교만 나왔어도 구로공단 공장에 댕기면서 즈이 집에 송아지 사왔다는디…”하는 식의 아버지에 대한 동네사람들의 갖은 구설에도 아랑곳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이따금 확신에 차 말씀 하셨다. “농사 짓는 땅은 가지고 있다가도 없어질 수 있지만, 늬들 머리에 짓는 공부농사는 누가 뺏어가겄냐…?”

그 덕에 자식들은 이제껏 배 곯지 않고 밥을 먹는다. 그것도 쌀밥을.
당시 아버지께서는 많지 않은 논에 모두 1960년대 중반에 도입 보급된 일본 벼품종인 ‘아끼바레(秋晴, 추청)’를 심으셨다. 1970년대 초반 식량증산을 위한 다수확 품종으로 개발돼 정책적으로 전국에 보급된 통일벼나 여타 수원○호·진흥 등의 쌀보다 수확량은 적었지만, 밥맛은 기름지고 찰진 것이 비교가 안될 정도로 월등히 좋았다. 지금도 아내는, 시골집 부모님께 첫인사 갔을 때 어머니께서 해 주신 아끼바레 쌀밥 맛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는 얘길 이따금씩 하곤 한다.

그 아끼바레 쌀밥 맛에 길들여져 가던 어린 시절, 마을엔 보리밥 만으로도 감지덕지 하며 살던 가난한 이웃들이 부지기수 였다. 심지어는 굶어죽는 초등학교 친구도 생겨났다. 그런 궁핍한 생활환경 탓인지 동네에서 낮이고 밤이고 서로 주고받는 인삿말이 으레 “진지 잡 수셨슈~?”였다.배 곯지 않고 밥 먹었느냐 묻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시고, 고된 서울살이를 이어가면서 내 아이들이 어렸을 적 ‘밥’의 소중함을 이따금씩 얘기해 주곤 했었다. 아이들이 식탐이 커 밥을 국이나 물에 텀벙 말아먹다 남길라치면 호되게 야단을 쳤다. 먹을 만큼만 말아 먹고,남겨 버리게 하지는 말라는 뜻에서다.그때마다 고향에서 4-H활동을 하던 때 입에 달고 살던 ‘식훈(食訓)’을 얘기해 주곤 했었다. ‘한 알의 쌀알에도 농민의 피와 땀과 정성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러거나 말거나 어린 아이들 귀엔 쇠귀에 경 읽기 아니었겠나 싶다.

서울이란 도시의 5월 봄 거리에 가로수로 늘어선 이팝나무의 쌀알 같은 흰 꽃이 바람에 일렁일 때나, 한강변 아카시 나무의 달착지근한 흰 꽃이 흩날릴 때면, 아버지·어머니의 손길이 느껴지던 아끼바레 쌀밥 생각에 지금도 눈시울이 시큰해지며 향수병을 앓곤 한다. 지금 농촌엔 추수가 한창일 터다. 아마도 어느 시골집의 안식같은 저녁상엔 갓 타작해 지은 흰 쌀밥이 꽃처럼 소담스럽게 사발 가득 피어올라 있을 것이다.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 못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먹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 //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 하늘을 몸 속에 모시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ㅡ김지하, 시<밥은 하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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