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명견 교수의 재미있고 유익한 옷 이야기(67)

"과거 찬란한 귀고리문화
우리나라가 다시 세계적인
귀고리 나라로 발전되면..."

귀고리를 하면 실물보다 1.5배 아름다워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귀고리는 종류도 다양하고 가격도 천차만별이며, 남녀 구분도 없이 애용된다. 재미있는 것은 귀고리의 역사다.
한반도에는 신석기시대(기원전 5900~4500년)에 옥 같은 석재로 만들어진 둥근 귀고리가 13점이나 출토됐다. 청동기, 철기시대의 귀고리도 발굴돼 있다. 아마도 오랫동안 주술적인 목적과 장식을 위해 사용했으리라 추측된다. 특히 삼국시대 귀고리는 정교하면서도 아름다워 일찍이 일본의 고고학자 후지다 료사꾸(藤田良作) 등 전문가들이 세계적인 예술품이라 극찬한 바도 있다.

고려를 거쳐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귀고리는 남녀노소 막론하고 흔히 달고 다니던 액세서리였지만, 불행히도 기록에만 의지하는 형편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인과 조선인을 구분하지 않고 사람의 목을 잘라 전공을 부풀리려던 장수들이 ‘이 수급의 귀에는 귀고리 자국이 있으므로 조선인’이라고 했다는 선조 때의 기록까지 남아있다. 또한, 유몽인의 <어우야담>에는 한 역관이 중국에서 겪은 실화 중 하나로, 대단히 콧대가 높아 조선인을 상대하지 않는 한 기생에게 중국인이라 속이고 접근했는데, 그가 워낙 중국어를 잘해 처음에는 속았던 그 기생이 그의 귀를 보고는 “귀고리 자국이 있으니 당신은 조선인”이라고 알아차렸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1572년 9월 선조는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之父母)라 부모가 준 몸을 감히 훼상(毁傷)하지 않는 것이 효(孝)의 시초라며, 남자들의 귀고리 착용 금지령을 내렸다. 이후 남자들의 귀고리 착용모습이 점차 사라졌고, 여인들도 귀를 뚫는 대신 귓바퀴에 귀걸이를 거는 형태로 바뀌며, 귀고리는 겨우 명맥을 잇는 수준에 그쳤다.
서양에서도 귀고리는 고대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남녀 공용의 장신구였다. 뿐만 아니라 이때까지는 여성보다 경제력이 있던 남성들의 차림이 더 화려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이 남성들의 정체성을 바꿔놓았다. ‘남성적’이란 말의 이면에는 정치, 사회, 군사 등의 대외적인 일에만 전심을 다하는 사람, 즉 화장하고 옷차림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 편견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됐다. 그 기간이 길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화장하고 멋을 부리는 남성(grooming족)에 대해 성 정체성을 의심하기까지 했다. 2000년대 들어 남성인데도 치장이나 옷차림에 금전적인 투자를 아끼지 않는 그루밍족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하면서, 남성들의 귀고리 차림이 늘어났다. 과거 하나만 뚫었던 구멍이 7~8개까지 늘어나며 다양한 귀고리를 한꺼번에 하는가 하면, 양쪽이 아닌 한쪽에만 하는 유행까지, 여성 못지않게 다양해졌다. 최근까지만 해도 우리말 사전에는 귀고리가 ‘여자들이 귓불에 다는 장식품’이라 풀이돼 있었다. 요즘은 이 풀이가 옳다고 보는 사람 없을 정도로 남자들의 귀고리가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유행이 모이면 문화가 되고 역사로 남는다. 기왕 온 이 유행이, 과거 찬란한 귀고리 문화를 이뤘듯이, 우리나라가 다시 세계적인 귀고리 나라로 발전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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