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후주 청년농업인연합회 정책연구소장

"농촌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돈을 벌고, 사업적으로 성공하는 것도

중요하다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기본으로 돌아가
‘모든 사람이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는 공간’으로
먼저 회복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때라고 생각한다."

▲ 김후주 청년농업인연합회 정책연구소장

충남 아산에서 유기농 배를 키우며 가공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농장주로서 준비가 됐다고 판단한 부모님은 얼마간의 농지를 증여하기로 결정하셨다. 증여받은 땅에서 농사를 지을 것이라는 증빙서류를 준비해 세무사를 찾았다. 법적인 준비사항을 모두 충족했지만 당황스럽게도 이런 말을 들었다.

“연령대와 성별 때문에 본인이 진짜 농민이라는 점을 의심받을 수 있어 농협 조합원 확인증 같은 추가적인 증빙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사무적으로 던진 말이었지만 순간 아득해지면서 내 앞에 굳세게 버티고 있는 검은 장벽을 만난 것처럼 느껴졌다. 경력이 길진 않지만 농사에 뛰어든 지 수년이 지났고, 다루지 못하는 농기계가 없으며, 그 어느 생산지보다 훌륭한 유기농 배를 생산해내고 있다고 자부했다. 헌데 여전히 농촌에서 ‘젊은 여성’이란 이유만으로 ‘진짜 농민’임을 증명해야 하는 존재였다. 내가 남성이었대도 저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되짚어보면 나는 고향에 돌아왔을 때부터 매번 저 장벽과 마주하고 있다.

“농원을 딸한테 물려준다고?”, “아버지나 남편 없이 여자 혼자 농사를 지어?”, “빨리 결혼해서 남편을 만들어야지”, “커피 좀 타와”, “여자는 기계를 못 다뤄”, “말로만 농사짓지.” 등등 좋은 말로 하자면 놀라움의 대상이고 솔직히 말하자면 일상적으로 매번 의심을 받고 호기심이나 조롱, 비하의 대상이었다.

농촌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지가 수십 년이 지나도록 근본문제는 해결하지 않고, 말도 안되는 임시방편으로 농촌을 마비시키고 또 오염시키고 있다. 그러면서 내부적으로는 도덕·문화적 지체현상이 심해지고, 외부적으론 기피하고 싶은 공간으로 시골 이미지가 점점 더 악화되고 있다.

농촌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돈을 벌고, 사업적으로 성공하는 것도 중요하다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기본으로 돌아가 ‘모든 사람이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는 공간’으로 먼저 회복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때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살고 싶어하는 공간에서만 경제와 복지의 발전이 이뤄진다. 아무리 혜택이 크더라도 그 공간에서 안심하고 살 수 없다면 그곳은 무인도처럼 버려질 것이다. 사실 이런 근본적인 변화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이다. 지원금을 주고, 건물을 짓는 것은 성과가 확실하고 가시적이며 즉각적인 반응이 있지만 문화적 풍토를 변화시키고 주민들의 삶의 질과 행복을 신장시키는 것은 긴 계획과 실행, 섬세한 고려사항들과 오랜 시간 정착시키기 위한 끈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현재 농업·농촌 재생정책은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효과에만 집중하고 있다. 도시의 신혼부부가 지방에 이주해오면 집을 주고 돈을 준다고 한다. 청년창업농에게는 생활비를 지급한다고도 한다. 고무적인 변화이며 절실했던 단비다. 하지만 이렇게 유인책을 써서 인구를 유치했다면 그 인구를 정착시키고 그 사람들 그 공간을 안전하다고 느껴야 하고, 아끼고 사랑하며 가꿀 수 있도록 장려해야 한다. 그 후속조치가 잘 되는지를 평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지표는 그 지역의 가장 소외되고 차별받는 약자가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는 것이다. 농촌에서 그 지표는 두말 할 것 없이 여성이다. 성차별이 생활화된 곳은 결코 안전하게 정착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이제 문명화된 시민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존엄하다는 인식이 상식으로 자리 잡았으며, 법과 제도로서 이러한 교양과 인권의식을 교육하고 그것을 존중하도록 구조화하고 있습니다. 한국도 여느 선진국에 못지않게 학교, 직장 등의 모든 공동체에서 성인지교육, 인권교육을 의무적으로 실시하고 있으며, 고용·임금·복지 등에 있어서 차별요소를 제거하기 위한 움직임이 급속도로 전파됐다.

성평등은 이익 대결이 아니며 모두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기반이 되기 때문에, 이런 변화는 절대로 퇴행할 수 없으며 앞으로는 법과 제도의 조치가 필요 없을 정도로 인권의 보편성이 굳건하게 자리 잡게 될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도시생활을 하다가 귀촌 후 현장에서 생업을 농업으로 삼아 지내면서 농촌에서는 이런 변화가 전무하다시피 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농업도 엄연한 국가의 기간산업이며, 농촌도 한국사회의 일부이지만 도시와 농촌은 철저히 분리돼 있는 두 세계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이 문제는 농촌 구성원 개인들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지극히 구조적이며 국가의 정책적인 대대적 개선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이 격차는 점점 커지기만 할 것이다. 도시에서 요구되 절반 정도만큼이라도 농촌에서 인권의 감수성과 시민으로서의 교양을 키우는 제도가 자리 잡을 수 있는 정책적 기반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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